‘6·29 선언’ 민주화 큰 족적… 내란죄로 단죄 ‘영욕의 삶’

육사 동기 전두환과 12·12 쿠데타
6·29 후 양金 분열로 대통령 당선
기업들에 2800억 뇌물 받고 구속

노태우 전 대통령은 ‘쿠데타 2인자’를 거쳐 ‘보통사람’을 외치며 대한민국 첫 직선 대통령에 올랐다. 그러나 퇴임 후에는 수감생활을 하며 오욕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12·12 쿠데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엘리트 장성, 군부 쿠데타의 주역, 민주화 이후 첫 대통령을 거쳐 수인이 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81년 7월 육군대장 전역식. 연합뉴스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현 대구 동구)에서 면 서기였던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나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79년 12월 12일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 ‘하나회’의 핵심 멤버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다. 쿠데타 성공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즉각 ‘신군부 2인자’로 부상했고, 수도경비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했다.

1981년 7월 정무 제2장관에 임명되면서 정계에 입문했고, 이후 체육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1985년 12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으며 전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부상했다.

6·29 선언과 첫 직선 대통령
1988년 9월 서울올림픽 개회식에 부인 김옥숙 여사와 함께 참석했던 모습. 연합뉴스

노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전국을 뒤덮었던 1987년 6월 10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치러진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하지만 ‘호헌조치’에 반발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신분으로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이는 ‘6·29 민주화선언’을 하게 된다. 역사적인 6·29 선언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지방자치 실시’ 등이다.

1987년 대선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실현되면서 야당으로의 정권교체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컸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두 김(金)’씨가 분열되면서 노 전 대통령이 반사이익을 누렸다.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노 전 대통령은 그해 연말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를 누르고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3당 합당
1990년 1월 청와대에서 민주당 김영삼·공화당 김종필 총재와 3당 합당을 발표하는 장면. 연합뉴스

노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가장 큰 정치적 이벤트는 1990년 1월 이뤄진 ‘3당 합당’이었다. 1988년 4·26 총선에서 민정당이 얻은 의석수가 야(野) 3당이 합친 의석수보다 뒤지면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당시 이끌던 통일민주당,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과 합쳤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이었다.

3당 합당 후에도 YS의 압박이 계속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국정 동력을 충분히 얻지 못했다. 하지만 YS는 3당 합당의 결과물로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JP가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DJP연합을 만들면서 민주세력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북방외교와 남북 기본합의서

탈냉전 시대와 재임 기간이 겹친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외교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 전 대통령은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했고, 이듬해인 1990년 9월 소련과 전격 수교했다. 1992년 8월에는 중국과의 국교도 정상화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라는 성과도 이끌어냈다.

공산국가와의 전격적인 수교로 만들어진 화해 분위기는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노 전 대통령은 1989년 9월 첫 남북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켰고, 이후 지속적인 남북 관계 재정립 작업을 통해 1991년 남북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비핵화 공동선언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1989년 10월 강영훈 당시 국무총리가 한국 총리로는 처음으로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고, 이후 남북한 총리가 8차례나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 기본합의서를 탄생시켰다.

1996년 8월 서울지법의 1심 공판에서 징역 22년6개월을 선고받는 모습. 국민일보DB

퇴임 후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35곳의 기업 대표로부터 2800억여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1995년 12월 5일 구속 기소됐다. 이로 인해 그는 헌정사상 구속 수감된 첫 전직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얻게 됐다. 노 전 대통령은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군부독재로 인한 단죄도 받아야 했다. 12·12 쿠데타 및 5·18 사건을 수사해온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을 군사반란 주도 혐의(반란수괴)로 기소하면서 노 전 대통령도 반란모의 참여와 중요임무 종사 등 혐의로 추가 기소했다. 수의 차림으로 법정에 선 노 전 대통령은 “역사는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심판의 대상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1997년 풀려났으나 전직 대통령 예우는 박탈됐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전립샘암 수술 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지병으로 인해 희귀병인 소뇌 위축증과 천식이 더해지면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별세했다.

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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