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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슬픈 죽음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고인의 마지막은 외롭고 서글펐다. 지난달 23일 숨을 거뒀는데 유족은 빈소조차 차리지 못했다. 돈이 없었다. 차렸다 한들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친척 몇 분이 조문을 왔지만 눈시울을 붉히며 슬퍼할 뿐 주변을 서성이다 하릴없이 발길을 돌렸다. 시신은 병원 영안실 차가운 냉동고에 3일간 보관됐다. 찾아오는 이도, 그리고 이들이 함께 슬픔을 나눌 공간도 없는 쓸쓸한 이별이었다. 발인도 쉽지 않았다. 운구할 사람이 없었다. 보다 못한 상조회사 직원들이 관을 짊어지고서야 시신은 영안실을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경기도 용인 모처에 안장됐다.

고 박태정 여사의 이야기다.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안중근 의사의 조카며느리라고 하면 좀 알아볼까. 박 여사의 시아버지는 안 의사의 친동생인 안정근 지사다. 안 지사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로 안 의사와 함께 삼흥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했다. 1918년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의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안 지사는 친형이 순국하자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황해도 신천에서 만석꾼으로 유명한 처가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걸 바친 셈이다.

안 지사의 아들이자 박 여사의 남편인 안진생씨는 선박 제조 기술을 배워 조국 독립에 이바지하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이탈리아로 유학해 한국 최초로 공학박사 학위를 딴 엘리트였다. 서울대 출신인 박 여사와 결혼하고 1960년대부터 외교관으로 일했다. 시련은 80년에 시작됐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외교안보연구원 본부 대사였던 안씨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해직됐고 그 충격으로 뇌경색을 앓다 88년 별세했다. 오랜 투병으로 재산은 남아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몰락을 본 충격 탓이었을까. 두 딸은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했지만 갖은 부침을 겪은 뒤 어머니 품으로 돌아왔다. 박 여사는 출가했다 돌아온 두 딸, 그리고 몸이 아픈 둘째 딸의 딸 등과 함께 월세집을 전전했다. 2011년 국가보훈처 도움으로 15평짜리 임대아파트로 옮겨서야 집세 걱정을 조금 덜었다고 한다. 그래도 항상 쪼들렸다. 근로소득은 제로였다. 고인 앞으로 나오는 기초연금과 첫째 딸 앞으로 나오는 보훈처 생활지원금, 거기에 약간의 후원금 등을 합쳐 한 달 1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돈으로 4명이 살았다. 여기에 지난 3월 첫째 딸이 숨지면서 지원금이 크게 줄었다니 이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꽉 막힌 우리 법이 문제였다. 유신정권은 73년 독립유공자 유족에 대한 보상 범위를 대폭 축소했다. 독립유공자의 고결한 희생을 높이 받들어 유족의 범위를 넓히고 보상을 확대하자는 개정안이 매번 발의됐지만, 그때마다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황당한 일도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수소문 끝에 국내 한 은행에서 2000만원을 후원받았는데 이를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은행 계좌에 한꺼번에 입금하면 기초연금 수급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 실무자는 ‘8년4개월간 매달 20만원씩 입금할까요?’ ‘이자는 어떻게 하죠?’ 이런 고민을 했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지게 하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초청한 행사에서 한 말이다. 이뿐인가. 그 이듬해엔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을 있게 한 정신이며 독립운동가 가문의 현재 삶의 모습이야말로 애국의 지표”라면서 “나라를 위한 헌신에 경제적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보훈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박 여사의 쓸쓸한 죽음이 우리 애국의 진짜 현실을 드러내는 건 아닌지 마음이 무겁다.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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