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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논단]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과)


유발 하라리는 이스라엘 역사학자다. 그는 2015년에 낸 ‘호모 데우스’에서 인간이 과학기술 발달에 힘입어 감염병을 이길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희생은 컸지만 어쨌든 과거의 흑사병과 천연두부터 최근의 사스, 에볼라 등 각종 질병을 하나하나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하라리는 인간이 조만간 영생불멸의 비법도 터득하면서 신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래서 책 제목이 호모 데우스(신이 된 인간)이다.

그 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코로나19가 터졌다. 생명과학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를 생물로 분류하지 않는다. 이 하찮은 미물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지난 2년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예방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고 있어 코로나19도 조만간 역사의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보다 더 악질적인 대규모 감염병이 또 발생할 것으로 본다.

인간의 자업자득이다. 무분별한 난개발로 야생동물이 살 곳을 잃고 있다. 새로운 서식지를 찾는다고 인간들 가까이 오면서 위험한 바이러스도 함께 가지고 온다. 코로나19도 그래서 퍼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지구온난화다.

세계기상기구(WMO)가 발표한 ‘2021 기후 생태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지구 평균온도는 산업화 이전보다 1도 더 높아졌다. 이 1도 때문에 지구가 사람으로 치면 39도 고열에 시달리는 셈이다. 여기에서 지구 온도가 1도 더 상승하면 인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날씨가 더워지고 습해지면서 바이러스가 더 광범위하고 빠르게 확산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감염병 확산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서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기후과학자 10명 중 8명은 이번 세대 안에 기후변화가 파국에 이를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지구 종말이 가깝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난주 영국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전 세계인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중병을 앓고 있는 지구를 구할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지구온난화를 늦추기 위해 순(純) 탄소 배출량을 제로(0)로 만드는 탄소중립의 꿈은 당분간 가망이 없어졌다. 국제사회가 함께 힘을 모아도 될까 말까 한 상황인데 서로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지금까지 탄소를 무한 배출했던 선진국들이 후발 국가들의 탄소 감축에 소극적인 것이 일을 꼬이게 만든 근본 원인이다. 미국이 30억 달러, 일본은 5년간 최대 10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지만 그 정도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다. 특히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 파리기후협정을 탈퇴한 만행에 대해 처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 틈을 타 세계 온실가스의 40%를 배출하는 중국 인도 러시아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이유야 어떻든 지탄받아 마땅하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개탄했듯이 “국가 간 분열과 불신” 때문에 기후위기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동 대응이 어려워지고 있다.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져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루소는 인간이 자기 개선 의지를 통해 문명의 발전을 이룩했다고 한다. 그러나 힘이 생긴 인간은 남과 비교하고 자신을 과시하는 등 허황한 욕심에 빠지면서 ‘정신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라리도 ‘인간 자신의 힘에 내재한 위험’을 걱정한다. 과학기술 발달은 인간에게 죽음조차 이겨낼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을 안겨 줄 것이다. ‘신이 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까.

코로나19를 통해 인간은 욕심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웃과 하나가 돼야 한다는 값비싼 교훈도 얻었다. 기원전 2세기 카르네아데스는 배가 난파했을 때 남을 밀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널빤지를 붙들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팬데믹 시대에는 그럴 수 없다. 그러다가 다 죽고 만다.

기후회의를 보면 인간은 신체적으로 조숙하나 정신은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와 같다. 이 힘과 정신의 불균형이 인간을 어떤 상태로 몰고 갈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인간이 ‘밝은 눈’을 갖고 싶고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필경 또다시 바벨탑을 쌓으려 들 것이다.

그러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것이 자유는 아니다.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여호와의 경고를 묵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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