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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향한 도약, ‘김연아 키드’ 김예림이 빛나는 시간

[니하오! 베이징 2022] <3> 피겨 국가대표 김예림

피겨 스케이팅 국가대표 김예림이 지난달 28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 인근 단풍나무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한결 기자

훈련을 막 끝내고 나온 김예림(18)은 빡빡한 일정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씩씩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그랑프리 1차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다음 날이었다. 전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12시간을 몰아 잔 뒤 곧장 태릉으로 훈련을 왔다고 했다. “하루라도 훈련을 쉬면 몸이 달라지거든요. 어제도 훈련하려고 했는데 일정이 어긋나서 못했어요.” 웬만한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말투였다.

김예림은 곧 선수 인생에서 중요한 관문을 지난다. 다음 달 회장배 랭킹전, 종합선수권대회 성적에 따라 내년 2월 베이징 동계 올림픽 무대에 설 선수가 결정된다. 어린 시절부터 올림픽 무대를 꿈꿔온 그를 포함해 쟁쟁한 ‘김연아 키즈’ 선수들이 여자 피겨에 할당된 단 두 자리를 놓고 경쟁한다. 지난달 28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 인근 카페에서 김예림을 만났다.

피겨에 반한 순간

김예림은 초등학교 입학식 직전 열린 밴쿠버올림픽 중계를 보다가 파란 드레스를 입은 김연아의 연기에 반한 순간을 또렷이 기억했다. “이전까지는 얼음 위에서 하는 종목 자체를 몰랐다”는 김예림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탄 채 점프를 하고 안무를 하는 게 너무 신기했다. 어린 호기심에 엄마에게 저거 해보고 싶다고 졸랐다”고 돌이켰다.

김연아가 아니었다면 김예림은 은반이 아니라 잔디 위를 달렸을지 모른다. 공 차고 놀길 좋아해서다. 사촌오빠들과 종일 공을 차다 잃어버리는 통에 부모님이 수도 없이 공을 새로 사줘야 했다. “엄마는 제가 피겨를 한다고 해서 너무 고마웠대요. 축구처럼 거친 운동을 한다고 할까 봐 걱정했었다고요. 운동을 시켜야 한다는 건 이미 직감하고 계셨고요, 하하.”

어렸을 때부터 그는 돋보였다. 국내대회 상위권을 휩쓴 데 이어 2018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한국 선수로는 김연아 이후 13년 만에 진출했다. 피겨 팬들은 또래 선수인 유영, 임은수와 그를 김연아의 뒤를 이을 ‘여자 피겨 트로이카’로 불렀다. 그는 올해 초에도 국내 대회인 회장배 랭킹대회와 종합선수권대회 우승을 휩쓸었다.

흔들린 시기도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2017년 발가락 골절을 당해 훈련을 쉬자 키가 석 달 만에 10㎝ 자랐다. 키가 큰 선수는 점프나 회전 때 무게중심이 흔들릴 수 있고 더 크게 다칠 수 있다. 이 무렵 잠시 부진했지만 꾸준한 훈련으로 다시 본궤도에 올랐다. 올해는 키가 지난해 초보다 3㎝ 더 자라 170㎝가 됐다. 그에게 늘씬한 키는 이제 연기를 더 돋보이게 할 무기다.

성취는 나의 힘

피겨 선수의 삶은 일반인의 시선으로 보면 다소 가혹하다. 어린 나이에 내린 결정으로 청소년기와 20대 초반 일상의 대부분을 바쳐야 한다. 일주일 중 하루 정도를 제외하면 종일 훈련의 연속이다. 그마저도 부상을 당하거나 몸 관리가 어려워 일찍 은퇴하기도 한다. 버티기 힘들 것 같은 생활이지만 김예림은 피겨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한눈판 적이 없다.

오랜 시간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주는 게 무엇인지 묻자 김예림은 ‘성취감’이라는 답을 내놨다. 그는 “시합 잘했을 때의 성취감이 제일 크긴 하지만, 하루하루 훈련이 잘되거나 기술이 생각대로 발전하는 순간마다 느끼는 성취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성장기에 키가 컸을 때도 주변 걱정만큼 힘들지는 않았다”며 “다만 그간 해오던 기술들이 잘 안되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게 어려웠다”고 했다.

지난달 2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 ‘스케이트 아메리카’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곡 ‘사랑의 꿈’에 맞춰 연기하는 모습. 연합뉴스

노력이 연기로 잘 드러난 때가 그에겐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그는 “(2018년)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은메달을 땄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면서 “주니어 그랑프리에 참가한 세 시즌 중 첫 두 시즌을 다 잘 못 했다. 등수를 떠나 제 기량을 못 보여준 게 속상했는데, 세 번째 대회에선 프리스케이팅도 클린(무결점)하게 마치고 그때 기준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기억했다.

그는 올해 초 열린 종합선수권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리 만족하지 못한다고 했다. 연기 과정에 실수가 있었고 선수로서 준비한 것 전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이유다. 그는 “(우승은) 정말 운이 좋아서 한 것 같다. 제가 해야 할 것 전부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다”고 했다. 완전한 연기를 위해 연습을 거듭하는 완벽주의자다웠다.

‘만두 누나’ 김예림

어린 시절부터 피겨에만 몰두해온 김예림은 다른 취미를 가질 여유가 별로 없었다. 중학생 시절 베이킹을 해본 적도 있고 아이돌 그룹 엑소(EXO)를 좋아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때만 한 흥미가 없다. 비시즌에는 지하철을 타고 선수 친구들과 홍대 카페 등 ‘핫플레이스’를 찾아가곤 한다. 대중교통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보통의 또래 같은 일상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다.

휴식시간이 일주일 중 하루뿐인 시즌 중에는 그마저도 어렵다. 그때 김예림은 반려견 만두와 집 근처 카페거리로 산책하러 나간다. 강아지 때부터 남매처럼 함께 큰 여덟 살 닥스훈트다. 사진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묻자 주섬주섬 꺼낸 휴대전화 배경화면도 만두 사진이었다. 사진첩에도 온통 만두를 찍은 사진이 가득했다.

김예림은 “제가 외동이라 만두는 남매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하다”면서 깔깔 웃었다. 만두가 사람만큼 똑똑하다는 자랑도 했다. 그는 “제가 힘들어서 가끔 울거나 하면 옆에 와서 핥아준다. 제 감정이 어떤지를 아는 것 같다. 그럴 때면 ‘너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국제대회에 나가느라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도 만두가 가장 먼저 현관에 나와 그를 맞는다.

그는 평소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잘 못 하는 성격이다. 피겨하는 딸을 키우며 헌신한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맘이 크지만, 민망해서 표현을 잘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제 인생이 곧 엄마 인생이 돼버린 셈이다. 엄마 인생이 거의 없다”면서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엄마가 저를 잘 보살피고 이끌어준 것 같다. 이런 얘기는 부끄러워서 직접 잘 못 한다”고 했다.

연아 언니가 간 길

김연아를 보고 피겨를 시작한 김예림은 그의 피겨 후배인 동시에 엄청난 팬이다. 선수 생활을 하며 어려움을 겪을수록 김예림은 선배 김연아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낀다고 했다. 김예림은 “한 살씩 더 먹고 경력이 쌓일수록 그런 생각을 한다”면서 “상상도 못 할 부담이나 압박이 있었을 텐데 흔들리지 않은 것도 대단하다. 나도 이 정도로 힘든데 도대체 어떻게 했을까 싶다”고 했다.

김연아에게 종종 조언을 구하는지 묻자 “제겐 유독 연아 언니가 많이 어렵다”며 쑥스러워했다.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떠올리는 팬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같은 선수 입장에서 보면 더 대단한 분이라서 더 어렵다. 연예인 보는 기분보다 더하다”면서 “질문하거나 조언을 구할 때 ‘이 질문이 너무 하찮아 보이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며 부끄러워했다.

김예림에게 당면한 목표는 김연아처럼 올림픽에 나가는 일이다. 어릴 때부터 그는 베이징올림픽에 나가는 걸 목표 삼아왔다. 최근 올림픽을 보는 시선이 약간 바뀌긴 했다. 그는 “올림픽에 나가면 꼭 결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올해 도쿄올림픽을 보면서 대회에 나가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의미란 걸 느꼈다”고 했다.

김예림은 도쿄올림픽을 모처럼 시청자 입장에서 지켜봤다. 여태 피겨 외 다른 스포츠 경기를 본 적이 없는 그에겐 특별한 일이었다. 그중 여자배구는 경기 시간까지 챙겨가며 몰입해서 봤다. 그는 “저도 선수 입장이어서 선수들이 느낄 부담이나 압박감에 더 몰입해 경기를 봤다”면서 “올림픽 무대에서 이렇게 응원받으면 무척 영광일 것”이라고 했다.

김예림은 스케이트를 타는 한 자신이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을 알고 있다. 이번 올림픽 출전에 도전할 때도, 훗날 선수 자리를 내려놓을 때도 마찬가지다.

“선수 생활을 마칠 때의 스스로에게는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최선을 다했을 테니까, 너무 아쉬워하거나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은 안 했으면 좋겠어’라고요.”

역시나, 어른보다도 더 어른다운 말투였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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