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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로컬 브랜드의 전설, 한림수직

김남중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몇 년 전 겨울 가족여행에서 제주 한림읍 성이시돌 목장에 들른 적이 있다. 1954년 제주에 부임한 20대의 아일랜드 신부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가 4·3사건과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지역 주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조성한 목장이다. 눈길을 어렵게 운전해 도착한 기억이 난다. 거기서 한림수직이란 브랜드를 알게 됐다.

성이시돌 목장에서 1959년 시작된 한림수직은 한국 최고의 니트 의류 브랜드였다. 목장에서 기른 양들의 털을 꼬아 만든 굵은 실을 뜨개질해서 따뜻하고 튼튼한 스웨터, 카디건, 머플러, 담요 등을 만들었다. 재래식 베틀을 이용해 직물을 짰다. 품질과 디자인이 훌륭해 명성을 얻었고, 외국인들에게도 알려져 1977년 서울 조선호텔에 직영매장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화학섬유와 값싼 중국산 양모를 당해내지 못하고 2000년대 초반 폐업하고 만다.

생산은 중단됐지만 한림수직 스웨터는 지금도 빈티지 시장에서 인기가 있다. 젊은이들이 중고거래 마켓에서 40년 전쯤 누가 샀던 그 스웨터를 되사고 있다. 일본에서도 한림수직 브랜드는 전설로 통한다고 한다.

이 한림수직이 거의 20년 만에 다시 살아난다. 지난 10일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서 ‘제주의 사라진 명품 브랜드, 한림수직 재생 프로젝트’가 공개됐고, 1주일 만에 목표액 300만원을 훌쩍 뛰어넘어 5800만원을 모금했다. 로컬 매거진 ‘인iiin’ 등 제주 기반의 콘텐츠를 만드는 재주상회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목장 측의 지지와 협력 속에서 다음 달부터 한림수직 브랜드를 단 스웨터, 목도리, 가방 등을 판매한다. 목장에 남은 50마리 정도의 양에서 채취한 양모와 재생 울을 섞어 사용하고, 한림수직의 시그니처였던 ‘아란 패턴’을 그대로 적용한다.

제주 여성들이 만든 스웨터에 아일랜드 특유의 아란 무늬가 들어가게 된 것은 아일랜드 수녀들에게서 뜨개질 기술을 배웠기 때문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성당에 다니던 소녀가 부산으로 돈 벌러 나갔다가 추락해 죽은 비극을 계기로 제주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양을 사 와서 키우기 시작했고, 양들에게서 나오는 털로 옷을 만들었다. 고향에서 어머니가 쓰던 물레를 들여오고, 아일랜드 수녀 3명이 제주로 들어와 여성들에게 직조 기술을 전수했다. 한림수직이 호황기였던 1970, 80년대 목장에서 키우는 양이 1000마리가 넘었고 일하는 사람이 1300명에 달했다고 한다. 1950년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시작된 브랜드, 고립되고 척박한 땅 제주에서 태어난 로컬 브랜드, 가난한 여성들을 돕기 위한 윤리적 브랜드, 천연 양털과 수작업으로 오래 쓰는 제품을 만드는 친환경 브랜드, 이런 근사한 이야기를 가진 브랜드는 지금도 보기 어렵다.

한림수직이 새로 시작되지만 이 브랜드가 가졌던 제주라는 지역성이 완전하게 복원된 건 아니다. 방적, 염색, 편직 등 제작 과정 대부분이 제주 바깥의 공장에서 이뤄진다. 제주도에 생산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제주 여성들이 만드는 옷이라는 오리지널리티를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가 과제라고 고선영 재주상회 대표는 말했다.

한림수직의 부활은 레트로 유행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 값싼 공산품의 시대에서 이야기가 있는 브랜드의 시대로, 로컬과 오리지널이 가장 커다란 매력이 된 시대로 가는 흐름을 반영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또 청년들이 로컬이라는 콘텐츠, 과거라는 콘텐츠를 발견하고 되살리고 이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방 재생 바람이 사라진 로컬 브랜드의 재생으로 확장될 것인지 기대도 하게 된다.

김남중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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