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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논단] 디지털 시대에 청년정책 혁신 필요하다

양승훈(경남대 교수·사회학과)


최근 한 제조 대기업의 연구원들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전공 관점에서 기계공학과 출신이 대다수였으나 20년 전쯤부터 전기장비나 배터리 등이 탑재돼 제품군이 다양해져 화학과나 신소재공학과, 전자공학과 등 새로운 전공자들이 들어왔다. 제품 모양을 그린 도면을 그릴 시간에 화학반응식을 쓰거나 역학 대신 전기화학이 더 익숙한 엔지니어들이 늘어났다. 다양한 전공자가 들어왔다고 조직문화가 급격히 변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저 같은 현상이나 공정을 부르는 말이 서로 달라 공동의 ‘사전’을 만들어서 말귀를 알아듣고 문서를 거듭 고치는 일을 막았다고 한다.

좀 더 큰 도전을 줬던 것은 디지털화였다. 보고와 결재의 전산화, 즉 전자결재가 20년에 걸쳐 추구됐다. 문서나 도면을 출력해 상사에게 보고하기 위해 결재판에 끼우고 펜을 챙겨가는 수고를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직원 대부분은 여전히 느리고 복잡한 사내 업무 시스템에 접속해 엉켜 있는 폴더를 습관대로 뒤지듯 관행으로 일하고 있었다. 여전히 메일을 쓸 때 ‘수신’ ‘참조’ ‘숨은 참조’에 누굴 어떤 순서대로 넣어야 할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파워포인트 ‘장표’를 예쁘게 꾸미는 트렌드는 끝나서 글자와 필요한 자료 사진 정도만 첨부한다. 느린 수준의 개선이 천천히 벌어지고 있었다.

최근 세대교체가 벌어지고, 제조 대기업 총수들은 조직에 새로운 바람을 넣기 위해 신사업을 추진하는 사내 벤처기업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네.카.라.쿠.배’(네이버, 카카오, 라인플러스, 쿠팡, 배민 등 국내 상위권 IT 기업)나 실리콘 밸리 출신 개발자, 기획자, UX디자이너 등이 멤버라고 했다. 이들은 메일과 사내 업무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내 메신저 대신 슬랙이라는 업무 메신저를 쓴다. 각자 개발한 프로그램이나 모듈은 오픈소스 작업 관리 시스템인 깃허브에 푸시(등재)한다. 문제 발생 시 관심 있는 직원이 의견을 달아 이슈를 만들고, 누군가 해결하면 이슈는 닫힌다. 메일보다는 해시태그(#)를 뒤져 최근 연구원들이 씨름하고 있는 주제를 확인하고 의견이나 해결책을 공유한다. 전사 경영목표에 따라 사업계획을 수립하면 하향식으로 ‘이행’ 관점에서 일하는 전통적 한국 기업의 관행이 아닌 자기들이 발굴한 일을 ‘지시’와 상관없이 상향식으로 하는 게 조직의 일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유연근무는 당연하고 최적화 관점에서 일하고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게 이미 문화가 됐다고 했다.

그런데 새로운 세대는 현장의 문 앞에서 막혔다고 한다.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제품에 탑재하기 위해 공장에 출장갔던 날 연구원들은 몇 시간을 대기와 불통 속에서 허송세월했다고 한다. 사내 업무포털에 출장 신청을 하고 차량 등록도 했어야 했다. 보안 때문에 불가피한 조치다. 문제를 바로 해결하지 못한 건 연구원들이 사내 업무포털을 쓰지 않아 봤기 때문이다. 누구한테 전화해야 하는지, 어떻게 메일을 써야 하는지. 실리콘 밸리에서 온 그들은 갑자기 오늘 배치된 신입사원이 되고 말았다. 연구원은 ‘현장의 벽’ 이야기를 하며 밝게 웃었다. 제조 대기업 조직은 그래도 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굴지의 글로벌 대기업에서도 사내 벤처, 연구개발 조직, 생산 사이트의 일하는 방식은 차이가 난다. 1980년대생이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시절에 제조 대기업의 하도급회사나 지역 중소기업은 인프라가 못 받쳐주거나 일하는 방식이 전통적일 확률이 높다. 센서를 통해 수집한 방대한 데이터에 기초해 의사결정을 하는 시절에 생산 실적을 입력하기 위해 직접 한 땀 한 땀 전산에 입력하거나 장부에 펜으로 쓰고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청년들이 무엇을 선호할지는 자명하다. 중소기업에서 느낄 낭패감과 좌절도 짐작할 만하다. 그런 낭패감과 좌절이 산업과 세대뿐만 아니라 지역 격차로 느껴질 수 있다.

청년의 낭패감을 줄이고, 중소기업과 지역을 혁신할 수 있게 정책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IT 대기업을 유치하는 일도 중요하고 지역에 있는 기존 중소기업의 디지털 인프라와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하는 디지털 네이티브 청년들이 이끄는 제조 스타트업을 키우는 건 어떨까. 소득을 보전해주고, 주거 여건을 만드는 것은 최소한일 따름이다. 청년들이 자신들의 일터가 낙후되고 발전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성장할 수 있다고 믿음을 주는 게 목표가 돼야 한다.

양승훈(경남대 교수·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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