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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는 언젠간 옵니다”

10년차에 첫 주전 인삼공사 리베로 노란 인터뷰

여자배구 KGC인삼공사의 리베로 노란이 지난 23일 대전 대덕구 KGC인삼공사 스포츠센터 훈련장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배구공을 던져 올리고 있다. 대전=윤성호 기자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또래보다 좀 통통했던 과체중 소녀는 살을 빼고 싶어 배구부에 갔다. 배구가 좋아서가 아니라 학교에 배구부밖에 없어서였다. 부모는 외동딸이 힘들게 운동하는 걸 꺼렸지만 ‘곧 그만두겠지’ 싶어 허락했다. 살 빼러 간 배구부에서 “빵과 음료수 주는 게 너무 좋았다”고 하던 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땐 아무도 몰랐다. 소녀가 배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단 한 번의 기회를 얻으려 9년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도, 소녀가 흔들릴 땐 부모가 결국 버팀목이 돼준다는 것도.

대전 대덕구 KGC인삼공사 스포츠센터에서 지난 23일 만난 리베로 노란(27)은 “요즘 하루하루 배구 하는 게 즐겁다. 코트에서 뛸 수 있어 감사하다”는 말부터 했다. 프로 경력 10년 차인 노란은 이번 시즌 처음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다.

고교 시절 전국대회 최우수선수, 리베로상을 수상하고 청소년대표에 선정된 노란은 2012년 IBK기업은행에 입단했다. 프로에서 주전 자리를 꿰차긴 어려웠다. IBK기업은행 시절에는 국가대표 출신 남지연이, 2018~2019 시즌 KGC인삼공사 이적 후에는 ‘도쿄 4강 신화’ 주역이 될 오지영이 있었다. 노란은 “프로에선 웜업존에 있는 시간이 많아 당황했다”며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기다리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노란은 시간이 그냥 흐르게 두지 않았다. ‘지난 9년의 시간’을 묻자 “선배들이 좋은 선수들이라 기술과 정신력을 보고 배웠다”고 말했다. 그래도 힘이 들 땐 “한 번씩 방에서 크게 울고” 털어냈다.

기회는 지난 4월에 왔다. KGC인삼공사가 이소영을 FA로 영입하자, GS칼텍스가 보상선수로 오지영을 택했다. KGC인삼공사는 새 리베로를 영입하지 않아 우려를 샀지만 노란은 이를 말끔히 지웠다.

27일 현재 노란은 디그 세트당 평균 6.059로 전체 2위(10경기 이상 출전 선수 중 1위), 수비 세트당 평균 7.765로 전체 2위, 리시브 효율 38.93으로 전체 3위를 기록하며 각종 수비 지표에서 상위권에 있다. 지난해 5위에 그쳤던 팀도 현재 8승 2패를 기록하며 선전하고 있다.

9년을 버틸 수 있었던 데는 부모의 지지도 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운동을 그만두게 했던 부모는 5학년 때 “결국 항복”했고 그 후론 최고의 지지자가 됐다. 딸이 “그만두고 싶다”며 울 땐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다독였다. 지난달 23일 노란이 경기 수훈선수로 뽑혔을 때 어머니는 “이제 잘 될 거다. 다치지만 않게 잘하면 이제 잘 풀릴 거야”라며 울컥해 했다.

힘든 시기를 보내는 이들에겐 노란의 존재 자체가 힘이 된다. 한 팬은 소셜미디어 메시지로 “내가 하는 게 맞나, 난 왜 그 자리 그대로인가 걱정하고 어둡게만 느껴졌는데 란리베(노란 리베로)를 보며 많이 배웠다”며 고마워했다.

SNS 팔로어도 시즌 전보다 2000여명 늘었고 경기가 끝나면 응원메시지도 한가득 들어온다. 팬이 늘면서 책임감도 커졌다. “말과 행동에 더 신중하고 조심하려고 해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노란은 팀 선배 한송이를 보며 선한 영향력을 체감한다. 노란은 “송이 언니는 배구를 굉장히 좋아하면서도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사람”이라며 “늘 긍정적인 에너지를 준다”고 말했다. 한송이는 최근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 감독이 쓴 수필집을 노란에게 선물했다. ‘이 코트 안에서 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일이지. 오늘도 행복하게 뛰자’라는 카톡 메시지와 함께 책에서 인상적인 문구도 사진으로 찍어서 첨부했다. “언니는 코트에서 뛸 수 있다는 것 자체에 행복함을 느끼는 선수예요. 그 마인드를 배우고 있어요.”

노란도 자신처럼 ‘한 번의 기회’를 기다리는 후배들에게 먼저 다가가려 한다. 노란은 “블로킹 한 번, 서브 한 번 치러 오랜만에 코트에 들어온 선수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 그 선수도 한 번의 기회로 인해 더 많은 기회를 받으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것”이라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기회는 언젠가 온다는 모범사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노란의 이번 시즌 목표는 부상 없이 포스트시즌인 ‘봄 배구’까지 잘 마치는 것이다. 그는 “KGC에 와서 한 번도 봄 배구를 한 적이 없어요. 휴가를 늦게 받아보고 싶어요”라며 웃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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