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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부다페스트에서의 약속

이원하 시인


부다페스트에서 내가 반드시 지키는 약속은 걸어서 이동한다는 것이다. 공항에서 숙소를 오고 갈 때를 제외하고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 매일 지도를 펼쳐 놓고 목적지를 고른 다음 운동화를 신고 카메라를 챙겨 문밖을 나선다. 도보로 왕복 4시간까지는 거뜬히 걷는다. 기운이 넘치는 날이면 왕복 5시간을 걷기도 한다. 물론 집으로 돌아와서 녹초가 되지만 말이다. 걸으면서 이곳의 문화나 습관을 알게 되는 게 좋다. 비밀스러운 골목길에서 만나게 되는 신비하고 기묘한 가게들도 좋다.

‘무조건 걷자’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작은 기억 중 하나일 뿐이지만 평범하게 공원을 향해 걷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조금 다른 길로 공원을 향해 걷고 있는데 자그맣고 허름한 빈티지 가게가 눈에 띄었다. 내부 조명이 어둡고 손님도 없어서 들어가기 망설여졌지만 묘한 끌림에 이끌려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갔다. 습한 냄새 뒤로 독특하고 신비로운 소품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구매하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어서 몇 가지 고른 다음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은 황급히 나갈 채비를 꾸리며 나에게 지금은 물건을 팔 수 없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점심 약속이 생겼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가게 문도 제대로 닫지 않고선 말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다른 가게에서도 다시금 겪었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이들에겐 돈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그건 사람이기도 했고, 사랑이기도 했다. 내가 가게 주인이었다면 약속에 조금 늦더라도 빠르게 물건값을 계산하지 않았을까. 뭔가 부끄러웠다. 이날 이후로 나는 삶의 많은 부분을 돈보다 중요히 여기게 됐으며 많이 걷게 됐다. 부다페스트에서는 걸으면 걸을수록 얻는 게 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의 정신은 몇 가지 슬쩍 훔칠 가치가 있다. 그 가치를 알기에 오늘도 나는 운동화를 신고 문밖을 나선다.

부다페스트(헝가리)=이원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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