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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제조원 표기 삭제’ 찬반 팽팽… K뷰티의 우울한 민낯

소비자 빼고 ‘자율표기’ 추진 논란
중소업체 “브랜드 위한 입법” 반대
정기국회 종료 전 통과될지 촉각


평소 화장품에 관심이 많은 직장인 차지은(30)씨는 화장품을 살 때 두 가지를 꼭 확인한다. 제조업체가 어디인지, 어떤 성분이 들어갔는지 살핀다. 차씨는 “처음 보는 제품이거나 너무 싸면, 어느 회사에서 제조했는지를 먼저 보는 게 습관”이라며 “믿을 만한 데서 만든 제품이면 믿고 산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서 유통되는 화장품 포장 겉면에는 제조업자와 책임판매업자를 반드시 표시해야 한다. 차씨처럼 화장품을 사면서 제조원을 확인하는 소비자가 10명 중 9명이라는 녹색소비자연대 조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앞으로 소비자가 화장품을 사면서 제조원 정보를 얻지 못할 수 있다. ‘화장품 제조업자 표시 의무’ 조항을 사실상 삭제하고 자율표기로 변경하는 화장품법 개정안이 추진되고 있어서다.

30일 녹색소비자연대 등 소비자 단체에 따르면 화장품 업계 안팎에선 오는 9일 정기국회 종료 전에 법안이 통과할지 주목하고 있다. ‘화장품 제조업자 표시 의무’ 조항 삭제를 놓고 소비자단체, 제조사, 중소기업 일부는 소비자 권리와 시장 성장을 위해 결사반대한다. 반면 대한화장품협회, 일부 중소 화장품 브랜드사 등은 자율표기를 적극 찬성한다.

한국의 화장품 시장은 진입장벽이 낮다. 판매업자가 넘쳐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식약처에 등록된 화장품 업체는 2만4000여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책임판매업자는 1만9963곳, 제조업자는 4134곳이다. 책임판매업자 중 약 70%는 연구개발 인력이 없고, 20% 이상이 10인 이하 소기업 또는 1인 기업이다.

그런데도 프랑스 미국에 이어 세계 3대 화장품 수출국에 오른 건 ‘제조자개발생산방식(ODM)’ 비중이 상당해서다. 제조사가 브랜드사 의뢰를 받아 완성품을 만들면 책임판매업자는 유통, 마케팅, 판매를 담당하는 식으로 시스템이 갖춰졌다. 분업으로 품질을 높이고 시장에서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조업자를 표시하지 않으면 힘의 균형이 브랜드사로 쏠리게 된다. 브랜드사는 이윤을 위해 더 싸게 만드는 제조사를 찾게 될 것이고, 제조사는 품질 좋은 제품을 만드는 제조업체로 성장하겠다는 동력을 잃게 된다. 화장품의 품질 저하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제품력으로 승부하며 세계 시장에서 K뷰티를 널리 전파하는데 앞장섰던 중소 브랜드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제조업자를 표시해 품질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중소 브랜드가 밀려나고, 자체 제조시설을 갖춘 대기업 위주로 시장이 재편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조업자 표시 의무 삭제가 추진된 배경에는 해외 화장품 브랜드사들이 국내 중소 브랜드 제품에 표시된 제조사를 찾아서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해 우리 수출에 피해를 준다는 주장이 자리한다. 이미 해외 수출품에는 제조업자를 의무적으로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 이에 대해 제조사들은 ‘비슷한 제품을 의뢰해 달라’는 식으로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법 개정 논의에 소비자는 배제됐다. 의약품, 식품 뿐 아니라 일반 생활용품에도 제조사를 표시해 품질을 보장하는데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화장품에서 이를 삭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은지현 녹색소비자연대 상임위원은 “시대를 역행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라며 “국민의 알권리를 떠나 기본적인 건강권 차원에서도 재고의 여지가 없다. 폐기돼야 할 법안”이라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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