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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논단] ‘비호감’ 민주주의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과)


가까이 지내는 한 철학 교수와 모처럼 통화했는데 대뜸 시비를 건다. 도대체 정치학 교수가 뭣 하고 있었길래 한국 정치가 이 모양이냐는 것이다. 정치가 잘못된 것이 어찌 정치학 교수 탓만일까만 정치학을 공부하고 가르친 죄로 고스란히 덤터기를 썼다. 하기야 나도 대통령선거 관련 기사를 일절 보지 않는다. 대통령 후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눈과 귀를 닫고 산다. 무관심이라기보다는 분노에 가깝다.

국민 60% 이상이 유력 후보들에 대해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한다. 후보들의 품성 자체가 문제가 되니 정책이나 비전에 눈길 돌릴 마음이 안 난다. 북한의 대외선전매체가 ‘썩은 술’이니 ‘덜 익은 술’이니 같잖게 이죽거리는데 반박하기도 어렵다. 역대급 비호감 선거가 되고 말 것이다. 후보들만 그런가. 경선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몽니나 부리고 정당들은 표를 모은답시고 헛발질 연속이다. 정치가 이렇게 국민의 염장을 질러도 되는 것일까. BTS와 K드라마 ‘지옥’의 나라에서 정치만 왜 이리 퇴영을 거듭할까.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근대 민주주의의 ‘원조’인 영국과 대통령중심제의 ‘성지’인 미국도 별반 나을 것 없다. 두 나라 사람들은 요즘 ‘절망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헤겔은 ‘미네르바 부엉이는 땅거미가 내린 다음 날개를 편다’고 했다. 학자들이 세상 바뀐 다음 뒷북이나 친다는 말이다. 서구에서 ‘민주주의의 죽음’을 진단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예사로이 볼 수가 없다.

‘서구 민주주의의 몰락’에 중국은 쾌재를 부른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최근 중앙 인민대표대회에서 ‘민주’를 39차례나 언급했다. 민주는 장식품이 아니라고 했다. 인민이 원하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중국식 ‘인민 민주주의’를 “인류 정치사의 위대한 창조”라고 자랑했다. 과연 그럴까. 코로나19 확진자 1명이 상하이 디즈니랜드를 다녀갔다고 출입문을 새벽까지 폐쇄하고 관람객 3만4000명 전원을 검사하는 사회,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면 누구든 ‘실종 처리’하는 나라, 투표 당일까지 후보도 공약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체제가 인민 민주주의라는 말을 참칭해도 되는 것일까.

오늘날 민주주의가 비록 동네 밉상이 되고 있지만 평등과 자유라는 그 근본정신만은 어떤 경우에도 버릴 수가 없다. 민주주의는 ‘피 흘리지 않고 정부를 바꿀 수 있는 제도’이다. 대통령을 아무리 욕해도 잡혀갈 걱정을 안 해도 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민주주의를 쟁취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던가.

그러나 여기까지이다. 이보다 한 단계 높은 선진 민주주의로 진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국민이 진정한 의미의 주인이 되고 체제 효율성도 높은 민주주의가 되자면 문명사적 양자 도약(quantum leap)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사람이 뒷받침돼야 한다. 제도만으로는 안 된다. 삶의 본질을 성찰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공익을 위해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토크빌은 사람들의 지적·도덕적 수준이 현격히 향상된 ‘먼 훗날’에나 위대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민주주의가 이토록 지리멸렬한 것은 사람들의 수준이 아직 충분히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들도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우리 중에서 저런 후보가 나왔고, 우리가 뽑았다. 남 탓할 때가 아니다. 나 자신이 비호감의 삶을 사는 건 아닌지 엄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선진 민주주의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업이다. 긴 호흡으로 삶의 방식, 특히 정치문화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급하게 덤벼들었다가 쉬 좌절하면 일은 더 어려워진다. 우선 한국 민주주의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부패 양당 구조를 혁파하는 데 힘을 모으자. ‘제3 지대’를 키워 기득권 거대 정당들을 혼쭐내자. 한국과 같은 중견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 집중은 시대착오다. ‘무능하고 비호감’인 대통령이 절대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권력 분산과 자율성 강화가 시대의 부름이다. 대통령제 폐지에 버금가는 권력 제도 개편을 공약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면 어떨까.

미국의 마틴 루서 킹은 “냉담이라는 사치에 탐닉하기에는 현재가 너무 절박하다”고 했다. 정치가 형편없다고 외면해버리면 누가 득을 볼까. 그래도 민주주의다. 민주주의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

서병훈 (숭실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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