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돋을새김] 신세계와 신기루 간격

김찬희 산업부장


“삐~삐~삐~치이익.” 요란한 기계음과 함께 신세계가 열린다. 파란색이 모니터를 가득 채우고, 그 위로 하얀색 글자가 뜬다. 대화방, 공개 자료실, 레포츠/취미, 게임/오락, 동호회…. 미래를 찾지 못하던 취업준비생에게 PC통신은 세상, 그 자체였다. 통신망 너머 누군가와 연결된다는 건 엄청난 공간의 장벽을 종잇장 구기듯 한 손에 쥐는 느낌을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고속통신망이 깔리면서 인터넷과 웹은 일상으로 깊게 스며들었다.

인터넷은 미국 국방부에서 1957년 설립한 고등연구계획국(ARPA)을 모태로 한다. ARPA는 컴퓨터와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었다. 조지프 리클라이더는 네트워크에서 컴퓨터들을 연결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도널드 데이비스는 컴퓨터 간의 대화법으로 ‘패킷 교환’ 방식을 고안해냈다. 1969년 12월 미국 내 4개 대학을 연결하며 인터넷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ARPANET이 시작됐다. 1992년 민간에 완전 개방된 인터넷은 자본주의·중앙집권 정부, 기득권에 저항하던 히피들이 만든 개인용 컴퓨터(PC)를 만나면서 웹이라는 사이버 공간을 꽃피웠다.

인터넷은 열린 시스템이다. 통제 대신 자율, 획일성 대신 다양성을 선택하면서 웹을 ‘지구의 두뇌’로 키웠다. 무한한 연결·협력, 시공을 초월한 자유와 정보의 공개·축적은 인터넷, 웹의 엔진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구축된 사이버 공간은 3차원의 가상세계 ‘메타버스’로 퀀텀 점프를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여기에 속도를 붙였다.

전문가들은 가상세계를 온라인 지도나 길 안내 같은 ‘현실 투영 가상세계’, 포켓몬GO 게임에서 보여준 ‘현실 확장 가상세계’, 온라인 게임처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가상세계’로 나눈다. 3가지 모두 또는 진정한 가상세계를 메타버스라 할 수 있다. 경제·사회·문화 활동이 디지털로 이뤄지는 공간(플랫폼)이 메타버스다.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메타버스가 급부상하면서 은행, 패션업체, 스포츠용품회사, 대학까지 뛰어들었다. 사실상 메타버스라는 거대한 흐름에 발을 담그거나 영향권에 들지 않는 산업이 없을 정도다.

코로나19가 촉매라면 메타버스를 뜨겁게 달구는 불씨는 무엇일까. 여러 해석이 있지만 가장 그럴싸한 건 저항 혹은 반항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현실 세계에서 MZ세대는 바늘구멍을 지나야 하고, 막힌 천장을 뚫어야 한다. 세대 간 소득 양극화, 자산과 일자리 불평등이 그들을 가상세계로 이끈다. 기득권이 없는 평평한 운동장에서, 익명 아래 이뤄지는 수평적 관계와 협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회를 캐낼 수 있다는 희망이 가상화폐를 거쳐 메타버스로 이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메타버스의 뼈와 근육인 인터넷, PC(스마트폰)는 히피 정신과 맞닿아 있다. 메타버스를 잠깐의 유행, 거품, 신기루로 보는 시선도 있다. 지나치게 열광한다는 비판도 공존한다.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불법, 차별, 혐오, 폭력 같은 사이버 범죄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특히 메타버스에서 이뤄지는 나(아바타)의 모든 ‘디지털 행동’이 남긴 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뜨거운 감자’다. 지금보다 더 많은 데이터가 쌓이고, 그걸 과도하게 수집해 도용·악용하는 일을 우려하는 것이다.

메타버스가 인류를 신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될지, 무모함과 탐욕의 바벨탑이 될지는 지금 꿰는 첫 단추에 달렸다. 너도나도 현상에만 열광한다면 빈 수레로 전락할 수 있다. 신세계와 신기루의 간격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그 간격에 인간의 자유의지, 자정능력, 집단지성이 자리한다고 믿고 싶다.

김찬희 산업부장 chki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