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동안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단어는 ‘가스라이팅’이었다. 2020년에는 ‘팬데믹’이 검색어 1위였는데, 당시 코로나19의 등장과 세계적 확산을 고려하면 그 이유가 충분히 공감된다. 하지만 코로나가 여전히 지속하고 경제 악화와 대선을 앞둔 정치적 쟁점이 쉼없이 생산되던 2021년, 왜 가스라이팅이 검색어 1위였는지 자못 궁금하다.

가스라이팅의 사전적 의미는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하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해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다.

1944년 영화 ‘가스라이트(Gaslight)’에서 등장했다. 재산을 노리고 거짓 결혼한 남편의 거짓말과 속임수로 파멸해가는 한 여성의 심리 상태를 묘사했다. 주변 환경을 악의적으로 조작하는 남편에게 심리적으로 지배당한 여성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받아들이며 고통받는 이야기를 다뤘다.

이단·사이비 사건들도 가스라이팅 범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교주와 간부들은 신도들이 거짓을 진실로, 진리를 거짓으로 믿게 만든다. 이러한 종교적 가스라이팅을 통해 신도들의 자존감과 판단력은 흐려지고 가족들과의 관계는 단절되며, 교주와 교리에 대한 맹신과 의존은 점점 깊어진다.

최근 주요 일간지들에 신천지의 가스라이팅식 전면광고가 게재됐다. 신천지의 코로나19 확산 당시 앞다퉈 비판 기사를 쏟아내며 시청률과 구독률의 두 마리 토끼를 잡던 이들이 신천지 전면광고를 게재하며 구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실리를 챙기는 이중적 행태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신천지 광고에 기꺼이 지면을 내준 이들의 윤리 실종과 도덕적 해이는 가스라이팅 범죄의 방조자이자 공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즘처럼 정치적 견해가 극단적으로 양분된 상황은 가스라이팅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한다. ‘사실’과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세상이다.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선택할 수 있는 SNS 환경의 세계화와 영향력은 편향을 공정으로, 야욕을 헌신으로 미화하는 데 효과적인 힘을 발휘한다. 권력욕이 정치적 신념으로 미화되고 욕심이 헌신으로 둔갑한다.

양극화된 환경에서 제3의 선택이나 중립과 중용은 설 곳이 없다. 오직 아(我)와 타(他)의 적대적 분리만이 생존에 효과적이란 인식이 팽배하다. 소위 촛불과 태극기 사이의 중간지대는 용납되지 않는다. 나와 같은 생각이 상식과 정의이고 나와 다른 생각은 몰상식과 불의로 치부된다. 나의 부족함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타인의 부족함에 대해서는 더없이 잔인하다. 마치 남과 북이 아닌 제3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6·25전쟁 포로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떠올리게 한다.

갈등과 대립이 불가피하다면 최소한 ‘다름’과 ‘틀림’은 구분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폭력은 신념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미화되고 가해자는 영웅으로 둔갑한다. 반대로 틀림을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변절과 변질이 합리화되고 협잡과 야합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작동하면서 심리적 지배 상태를 넘어, 성적·물질적 착취로 발전하거나 심지어 인격을 말살하고 생명마저 빼앗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영악스러운 인간들의 교묘한 가스라이팅 화법이 마치 관심과 애정의 표현인 것처럼 슬며시 다가와 우리 일상과 관계를 일그러뜨린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시 120:2)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현대종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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