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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중학생 아들 무사귀가 바라며 예배당 바닥서 기도하던 함송현 권사님… ‘영적탯줄’ 아직 든든합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머니]

필자 김관선 목사는 서울시 서초동에 위치한 산정현교회를 27년째 담임하고 있으며, 예장총회(합동)의 기관지 기독신문의 주필로도 섬기고 있다. 산정현교회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분립하여 1906년 1월 26일 펀하설(C.F.Bernheiel)선교사에 의해 평양 산정재에 설립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 목사, 물산장려운동의 조만식 장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장로 등을 배출한 역사 깊은 교회이다.

김관선 목사의 어릴 적 가족 사진. 아랫줄 왼쪽이 김목사 이다.

서울의 약수동에서 살던 어린 시절, 꽤 넉넉한 집의 일곱 남매 중 여섯째였고 넷째아들이었다. 그런데 5학년 무렵 갑자기 아버지의 사업이 몰락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갑작스럽게 서울의 변두리 동네로 이사하는 것으로 그 몰락을 실감했다. 거기서 장충초등학교까지 통학했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려면 아침 일찍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형편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중학교에 진학했다. 7천 원 정도 되는 중학교 1기분 수업료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동아일보 배달원이 되었다. 당시는 저녁신문이었는데 학교를 마치면 보급소에 가서 3백부 정도를 옆구리에 끼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그래도 그 학비를 해결하기는 어린 내게 벅찬 일이었다. 학교 출석부 내 이름이 적힌 옆 난에는 “등교정지”라는 선명한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그 때는 그랬던 것이다. 학비를 내지 못하면 학교도 오지 말라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1학년인 난 너무 힘든 현실에 어쩔 줄 몰라 가출을 시도했다. 2박3일 동안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 가출 사건은 ‘나의 어머니’를 매우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기회였다.

400원을 들고 아무런 계획도 없이 집을 나선 나는 서울역에서 인천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던 서울을 떠난 것이다. 당시로서는 인천이라는 ‘먼 곳’으로 처음 간 것이다. 수요일 저녁이었다. 동인천역에 내린 난 빨간 십자가를 보고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수요예배를 드렸다. 겨울이었기에 변변한 옷도 입지 못한 나는 난로 곁에 앉아 몸을 녹이며 난 이제 어쩌나 싶어 넋이 나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다행히 예배 후에 기도하는 분들이 많아 계속 여기 앉아 밤을 보낼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떤 20대의 그 교회 다니는 형이, 처음 보는 내게 다가왔다. 갈 곳이 없어 보이는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재워주었다. 단독주택의 크지 않은 방에서 그 이름 모를 형과 함께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신상을 캐지도 않았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을 보낸 후 무작정 가출조차 실패한 경험을 품은 채, 그 고마운 형을 마음에 담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막상 집에 들어가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교회로 향했다. 밤 11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늦은 시간 예배당 입구에서 담임목사님의 사모님을 만났다. 나를 본 그 분은 “어디 갔다 온 거니?”라며 내 손을 잡고 예배당 안 강단 쪽으로 이끄셨다. 그런데 거기서 본 광경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아, 어머니였다. 의자도 아닌 강당 앞의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어머니. 나를 발견한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시더니 내 손을 잡고 집으로 가셨다. 그리고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신 채 “자라”고 하셨다. 다음 날 아침밥을 먹이고 학교에 보내셨다. 그리고 93세로 천국에 가실 때까지 아무 것도 묻지 않으셨다. 그냥 얼마나 힘들지 아셨던 것이고 그 아픔에 굳이 파고들지 않으신 것이다. 나 역시 어머니가 아파하실 것을 생각해서인지 한 번도 그것에 대해 말씀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생생한 기억은 예배당 바닥에 엎드려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김관선 목사 부모의 생전 모습.

그렇다.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나의 기도생활과 신앙은,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듯 그 어머니 덕이다. 출생할 때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을 잘랐지만 나의 영적 탯줄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예배당 바닥에 꿇어 엎드렸던 어머니는 내게 어디 갔다 왔는지는 묻지는 않으셨지만 아들이 돌아오면 ‘주의 종’으로 드리겠다고 서원하셨다는 말씀은 하셨다. 그 어머니의 뜻대로 목사가 되고 싶었고 그 뒤로 한 번도 딴 마음을 먹은 적은 없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학창시절은 길게 이어졌지만 그 어머니의 뜻도 함께 이어갔다. 대학원까지 역사를 공부하고 석사 정훈장교로 육군 중위 임관하여 군 생활을 하고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여기까지 왔다. 학비는 이렇게 저렇게 채워졌고, 공부과정이 길어서 비교적 늦었지만 목사가 되었다. 서른여덟 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부목사 생활 1년 만인 1994년 12월 놀랍게도 현재 시무중인 산정현교회에 부임했다. 서른아홉이었다. 그리고 28년째 섬기고 있다. 넷째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그렇게 힘이 컸다.

어머니는 충현교회 권사님으로 섬기다가 2012년 8월, 천국에 가셨다. 충현교회가 역삼동에 예배당을 지을 때의 기억도 다시 떠오른다. 당시 김창인 목사님이 강남 시대를 여셨지만 지금의 그 예배당 땅에는 건축허가가 나지 않았다. 김창인 목사님은 예배당 대지에 컨테이너 박스를 놓고 기도를 시작하셨다. 성도들이 그 컨테이너 박스를 기도실로 삼아 밤낮 연속으로 기도를 이어갔다. 어머니 역시 그 기도실을 지키는데 온 힘을 쏟으셨다. 걱정이 돼서 몇 번 가봤다. 밤을 새워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의 그 웅장한 예배당은 그런 눈물 위에 건축된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사람도, 예배당도 세우는 힘이었다.

평양에서 한국전쟁 전 분단 상황에서 38선을 넘어 월남하신 어머니, 신앙만이 살 길이었던 어머니는 홀로 교회생활을 시작하셨다. 아버지(고 김한진)는 일에 바쁘셔서 교회 갈 생각을 못했다. 그러나 충현교회의 시작부터 자리를 지키신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십일조를 계산하셨다. 이중장부를 만들어 회계부정을 저지르면서 십일조를 빠트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헌신이 아버지를 신앙생활로 이끄셨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헌금생활을 했는데 왜 그렇게 경제적으로 그 어려운 시련을 견뎌야 했는지 가끔은 하늘을 쳐다보면 묻기도 한다.

비록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꾸리셨지만 항상 어머니의 마음은 여유로웠다. 하나님을 향해서 그랬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60, 70년대에는 거지도 많았다. 대문을 두드리는 거지는 깡통을 들고 다니면서 밥을 구걸했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허름하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 찾아온 거지를 집안에 들이였다. 밥상을 정성껏 차려 대접하는 모습을 내게 선물로 안기려고 하셨나 보다. 잊히지 않는 모습이었고 그런 나눔에 대한 하나님의 상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결혼을 앞둔 나는 역시 가난했다. 신학대학원 2학년 재학 중이었다. 정훈장교 시절 모은 400만원이 전 재산이었던 나는 예배당 지하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 400만원이 나의 결혼 비용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아무런 경제적 지원도 못하심이 매우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난 어머니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어머니의 눈물로 성장했고 공부했다. 그리고 내 삶을 이어온 것이니 결혼 비용은 지원하지 못하셨지만 평생을 살아갈 가장 소중한 유산을 안겨주신 어머니다. 일곱 남매를 키우느라 힘을 다 쏟아 부으신 어머니, 특히 막내아들을 목사 만들겠다고 엎드린 그 어머니의 세월은 결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난 최고의 사랑과 지원을 받은 것이다. 목회를 하는 내내 매주 월요일은 나에게 ‘어머니 날’이었다. 그 날은 어떤 스케줄도 잡지 않았다. 늘 어머니에게 갔다. 어머니는 그런 나와 아내를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 주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밥을 차려줄 수 없게 되면서 아내가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던 어머니가 음식도 넘길 수 없게 되었다. 그 곁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 어머니의 기도의 시간을 소환하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내게 마지막 선물을 하시고 천국으로 가셨다. 그 날은 2012년 8월 23일 새벽 한 시였다. 전화로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충청도에서 집회 중이었다. 월요일에 시작되어 목요일 새벽에 마치는 그런 집회였다. 어머니께서 나의 이 집회를 마무리 잘하도록 소천 시간까지 맞춰주시려고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까지 차질 없이 집회를 잘 마치고 이른 아침, 마침 계룡대 공군본부 군악대에서 군 생활 중인 아들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목요일부터 토요일까 장례를 치르면서 어머니를 송별했다. 이렇게 시간을 잘 맞춰주시다니 고맙고 또 고마운 어머니다. 물론 어머니가 이렇게 의도하셨을 리 없겠지만 어머니의 평생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셨으니 하나님의 은혜로만 볼 일은 아니다 싶다.

이제 그 어머니가 곁에 계시지 않다. 아들 입장에서 그런 어머니에게 별로 해드린 기억이 없다. 그래도 내가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셨고 우리 예배당 리모델링 후 입당했을 때 어머니는 아끼고 아껴 모으셨을 200만원을 제 손에 쥐어 주셨다. 그 돈으로 담임목사실의 응접용 소파 세트를 장만했다. 그 자리에 앉고 눕고 또 손님을 맞으면서 어머니의 체취와 그 따뜻함을 느끼고 있다. 이제 몇 년 남지 않은 목회 기간에도 그 느낌만은 계속 간직하고 싶다.

아, 어머니! 그 기도의 무릎과 눈물. 그것은 내가 물려받은 가장 소중한 재산이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은 유산이다. 그런데 난 둘 뿐인 내 아들과 딸에게 어머니 같은 유산을 물려줄 자신이 없어 하늘에 계실 그 어머니를 쳐다볼 뿐이다.

김관선 목사(산정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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