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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 엘리트 아닌 ‘리틀 트럼프’… 美 버지니아 주지사의 배신

영킨, 공화 온건보수 기대 깨고
마스크·비판적 인종이론에 반기
트럼프 단골 주장 다시 빼들어

글렌 영킨 미국 버지니아주지사가 지난 15일(현지시간) 버지니아 주도 리치먼드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관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AP뉴시스

미국 버지니아주는 미국 정치의 중심과 다름없다. 수도 워싱턴DC 바로 옆에 있어 우리나라로 치면 수도권에 해당된다.

버지니아 정가는 오래전부터 민주당이 득세했다. 그러나 지난해 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선 글렌 영킨 주지사가 선출되며 버지니아주의 정치 색깔은 푸른색(민주당 상징)에서 붉은색(공화당 상징)으로 바뀌었다.

영킨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멀찍이 거리를 두며 ‘공화당의 새 흐름’을 창조할 인물로 각광받았다. 아이비리그 출신에 헤지펀드 대표를 지낼 정도로 명석한 엘리트인 데다 정치 이슈보다 주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실용적 공약으로 당선돼서다.

그러나 집무를 시작하자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연방정부의 초·중·고 학생 마스크 착용 의무화 조치를 무력화하고 공립학교 교과서에 흑백차별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는 주정부의 교육제도마저 무효화하는 등 11개의 행정명령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23일(현지시간) 공화당 내 전통적인 온건보수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영킨 주지사가 알고 보니 트럼프 전 대통령과 흡사한 유형의 인물로 드러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의 행정명령이 트럼프가 채택했던 ‘문화전쟁’의 이슈로 주지사 선거 당시의 실용적 공약과 동떨어진 것들이라는 것이다.

영킨 주지사는 지난 15일 취임식에서 “학교 교실 안에서 정치를 없애고 본질에 집중하겠다”면서 민주당 지배 주의회가 통과시킨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CRT)’의 배척을 선언했다. CRT는 인종차별이 개인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백인우월주의에 기초한 법과 제도에서 기인한다는 이론이다.

영킨 주지사는 이어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등교하지 못하도록 한 연방정부의 조치는 행정 과잉이다. 코로나19 감염을 막기 위해서라면 다른 방편도 있다”며 마스크 착용 의무화도 무효화했다.

CRT와 마스크 착용 의무화 반대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 트럼프 본인과 측근들이 흔하게 내놨던 단골메뉴다. 2020년 팬데믹이 시작되던 시점에 대통령이 나서서 방역보다 방임을 강조하는 바람에 미국의 코로나19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았다는 평가가 많다.

사실 영킨 주지사가 당선된 것은 공화당과 영킨 자신의 역량이라기보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물가 상승을 우려한 유권자들이 민주당으로부터 등을 돌려서였다. 따라서 버지니아 주민들은 영킨 주지사의 정책이 경제 문제 해결에 집중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주민들의 기대 대신 ‘트럼프의 유산’을 첫 정책카드로 꺼내든 것이다.

WP는 “여전히 민주당 강세 전통이 남아 있는 버지니아에서 민주당도 공화당도 영킨 주지사에 대해 큰 실망을 나타내고 있다”면서 “전국적 인물로 부상하겠다는 주지사 자신의 야심을 위해 버지니아가 희생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주 전체로 번지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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