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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이름 뒤에 숨은 행복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여든이 넘어 이름이 알려진 사진작가가 있다. 매일매일 사진을 찍고 활동했지만 오랫동안 무명이었다. 그는 유명해지는 법을 알지 못했고 원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무명의 삶을 살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울 레이터라는 사진작가 이야기다. 그는 주목받는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았다. 아름답다고 느낀 평범함 일상을 조용히, 지속적으로 카메라에 담았다.

레이터의 전시회가 열리는 서울 남산의 ‘피크닉’은 붐볐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그의 사진 300점을 보려는 관람객의 줄이 길었다.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라는 전시명처럼 설렌 기운이 어렴풋하게 공간을 메웠다. 시간별 입장표는 거개가 매진이었다. 이 정도라면 열풍이 불었다고 해도 좋겠다.

미국 피츠버그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랍비가 되려고 공부하던 레이터는 스물세 살에 마음을 바꾸었다. 스스로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 홀로 뉴욕으로 건너왔다. 그가 발 디딘 1940년대 뉴욕은 다양한 작가들의 실험이 펼쳐지는 뜨거운 예술의 터전이었다.

열두 살에 어머니로부터 처음 카메라를 선물 받은 레이터는 무심히 일상을 찍었다. 뉴욕에서도 집 근처를 떠돌며 특별할 것 없는 장면을 찍었다. 그의 사진 구도와 색감이 매우 독특했다. 당시엔 흑백에 비해 예술성이 뒤처진다고 취급받던 컬러 필름을 사용한 레이터의 사진들은 모호하고 흐릿하지만 독창적이었다. 뉴욕의 194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사회 풍경은 레이터를 통해 되살아났다. 작품 제목이 된 사람의 손, 얼굴, 신발, 옷, 우산 등은 전체 구도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사진의 양감을 풍성하게 만들고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냈다. 거울이나 유리창에 굴절된 인물과 사물은 선명하지 않아 더욱 눈길을 끈다. 무엇을 찍은 것인지, 전체를 파악하려는 관람객의 시각은 섬세해진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 한 편의 시처럼 읽혔다.

독일의 예술서적 출판사 슈타이들이 그의 사진집을 출간하자 세상은 레이터가 포착한 일상의 아름다움에 놀랐다. 사진들이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여든세 살 무렵의 일이었다. 유명해진 뒤 레이터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안 바뀌었다. 이전처럼 살았다. 아흔 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의 예술적 욕망은 일상의 행복을 넘어서지 못했다.

46년 동안 함께 지냈던 화가이자 모델인 연인 솜스 밴트리를 찍은 사진들에서 레이터의 내밀한 삶의 정황이 엿보였다. 이들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전시장 옆 건물의 지하 공간에서 레이터의 다큐 영화를 보았다. 52년 동안 줄곧 살았던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좁고 낡은 아파트 한쪽 구석 의자에 앉아 영상 인터뷰를 하는 레이터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유명하다거나 컬러 사진의 선구자라는 말에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그저 누군가의 창문을 찍는다. 그게 뭐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시큰둥하게 툭 던지는 말에는 함의가 많다. 도시의 일상을 관찰하고 스며들어 사진을 찍었고 어떤 예술 운동이나 사조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의 예술적 업적은 누구의 평가에도 좌우되지 않았고 고유한 색채의 사진예술을 끊임없이 지속했다는 것이다.

솜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야 레이터의 표정에 감정이 실렸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자신의 사진을 훌륭하다고 말해줬던 연인, 그림에 대해 토론하며 순도 높은 예술 감각을 유지했던 연인. 레이터 가까이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행복한 어리석음으로 스스로를 낭비했다”라고 회상하는 그의 말은 시니컬했지만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명성보다 행복을 좇았던 한 사진작가의 삶은 사후에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신의 호흡대로 살아가기, 예술적 도취로 스스로를 추켜세우지 않기, 가까운 사람과 삶을 나누기. 진짜 예술가에게 이름이 무엇이 중요했겠는가. 행복한 어리석음이 그의 삶을 만들었다. 이름 뒤의 그 행복감이 시공간이 다른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잖은가.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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