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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성 작가] 세상 험곡의 바닥에서 분노가 익어갈지라도 사랑은 희망을 틔운다

가난한 영혼의 삶을 통찰한 사랑과 연민의 메신저 존 스타인벡


빈민 계층과 경제권을 빼앗긴 소수 민족의 이야기와 기계 문명에 반대하는 글을 써 온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1902~1968·아래 사진)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많은 상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주요 작품들은 성서에 뿌리를 두었으며, 미국 문학의 산맥으로 상징된다. 특히 대표작 ‘분노의 포도’에서 톰 조드의 가족이 대대로 소작하던 땅을 빼앗기고 새로운 생계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모습은 애굽에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떠올리게 한다. ‘분노의 포도’는 미국 오클라호마 주에서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해야 했던 조드 일가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1930년대 미국의 경제 대공황 시기, 농부들은 계속되는 모래폭풍과 한발에 무릎을 꿇고,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오클라호마의 자연재해와 농업기계화로 쫓겨나 캘리포니아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소작농들의 기약 없는 구직 행렬이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66번 도로에 끝없이 이어졌다. 미국 대륙을 동서로 횡단하는 ‘루트 66’은 일명 ‘마더 로드(Mother Road)’라고도 부르는데, ‘분노의 포도’ 12장에서 유래한 말이다.

“66번 도로는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이다. 흙먼지와 점점 좁아지는 땅, 천둥 같은 소리를 내는 트랙터와 땅에 대한 소유권을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게 된 현실, 북쪽으로 서서히 밀고 올라오는 사막, 텍사스에서부터 휘몰아치는 바람, 땅을 비옥하게 해 주기는커녕 조금 남아 있던 비옥한 땅마저 훔쳐 가 버리는 홍수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은 좁은 도로와 수레가 다니는 길과 바큇자국이 난 시골길을 달려와 66번 도로로 들어선다. 66번 도로는 이 작은 지류들의 어머니며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이다.”(‘분노의 포도’ 중)


스타인벡은 당시 중남부의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서부로 이주하게 된 것은 자연재해 때문만은 아니라 전통적인 시스템의 붕괴 때문이라고 봤다.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짓던 농부들은 땅도, 일자리도 잃었다. 이들에게 구인 광고 전단이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콩 따는 인부 모집 중. 일 년 내내 고임금 지급. 인부 800명 모집.’

그러나 고향을 떠나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톰 조드의 가족은 이내 좌절한다. 그곳은 또 다른 고통의 땅이었다. 너무 많이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일자리는 나오는 족족 사라졌다. “열심히 포도밭에서 일하면 몇 달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우리도 집을 살 수 있을 거야”라는 희망이 사라져갔다. 배고픈 사람들의 영혼 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가득했고, 가지가 휠 정도로 열매를 맺었다. 작품엔 굶주린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농산물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작물을 버리는 자본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값을 유지하기 위해 덩굴과 나무의 뿌리가 만들어 낸 열매들을 파괴해 버려야 한다. 이것이 무엇보다 슬프고 쓰라린 일이다. 차에 가득가득 실린 오렌지들이 땅바닥에 버려진다. 사람들이 그 과일을 얻으려고 먼 길을 왔지만, 그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사람들이 호스를 가지고 와서 오렌지에 휘발유를 뿌린다.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며 과일을 먹고 싶어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황금색 오렌지 위에는 휘발유가 뿌려진다.”


그러나 작가는 약속의 땅을 향한 고통스러운 여정을 통해 희망의 가능성이 여전히 인간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저녁이 되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무 가족이 한 가족이 되고, 아이들은 모두의 아이들이 되는 것이다. 고향을 잃어버린 슬픔은 모두의 슬픔이 되고, 서부에서 황금 같은 시절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꿈도 모두의 꿈이 되었다. 어떤 아이가 아프면 스무 가족에 속한 100여 명의 사람이 모두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천막에서 아이가 태어날 때면 100여 명의 사람이 모두 밤새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침묵을 지키다가 아침에 기쁨을 함께 나눴다.”(‘분노의 포도’ 중)

우린 한 영혼의 일부

주인공 톰 조드가 전직 목사인 짐 케이시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에 눈뜨게 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톰은 케이시의 정신을 이어받아 “모든 사람은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갖고 있어 우리는 모두 이 영혼의 일부”라는 생각에 이르러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삶을 걷겠다고 말한다.


“저는 사방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가 어디를 보시든. 배고픈 사람들이 먹을 걸 달라고 싸움을 벌이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 경찰이 사람을 때리는 곳마다 제가 있을 거예요.”(‘분노의 포도’ 중)

포도는 땅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성서 식물이다. 책의 제목 ‘분노의 포도’는 포도 수확의 새로운 꿈에 부풀었던 이들이 막상 현실에서 맞닥뜨린 좌절을 상징한다.

“고발조차 할 수 없는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 울음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다른 모든 성공을 뒤엎어 버리는 실패가 있다.…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 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 간다.”(‘분노의 포도’ 중)

그러나 스타인벡은 모든 역경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라고 믿었다. 이기적인 ‘나’가 이타적인 ‘우리’로 변할 때 생기는 공동체성에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그의 사상은 신앙이 원천이었다. 그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삶을 통해 교회라는 제도적이고 획일적인 형식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 거부와 비판은 종교의 위선과 현실 안주에 대한 거부였다. 그가 어린 시절 읽었던 성경은 그의 작품 대부분을 풍성하게 만드는 주된 원천이 된다. 그는 약자에 대한 평생의 공감을 통해 사랑과 연민의 전달자가 됐고, 그의 작품들은 인류를 위한 종교적 지침이 됐다.


스타인벡이 약 1년간의 취재를 거쳐 1939년에 발표한 ‘분노의 포도’는 미 정부가 캘리포니아의 이주 노동자에게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며 무엇보다 그에게 퓰리처상(1940)을 안겨준 값진 작품이 됐다. ‘분노의 포도’ 이후 대작으로 꼽히는 ‘에덴의 동쪽’(1952)의 틀 역시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뿌리를 둔다. 인간의 원죄라는 주제에 천착해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모습과 나아가 구원에 이르려는 끈질긴 노력을 담았다. 이후 그는 196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1964년 존슨 대통령에게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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