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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천 대신 썼던 마대… 단색화 대가 하종현의 날개 되다

국제갤러리서 15일 개인전 개막
가난했던 60년대 쌀 포대에 그림
‘접합’ 이어 ‘이후 접합’ 연작 공개

‘이후 접합’ 연작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하종현 작가.

1960년대 후반, 전쟁 후의 곤궁함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작가로 생계 전선에 뛰어든 30대 신진 작가이던 그는 캔버스나 유화 물감을 사기가 힘들었다. 당시는 국산이 제대로 없어 일본산을 수입해 써야 했으나 너무 비쌌다. 궁여지책으로 남대문시장에서 텐트 천을 사서 대신 사용해보는 등 여러 실험을 하던 어느 날, 쌀 포대로 쓰던 마대가 눈에 들어왔다. 마대는 올이 굵고 성긴 삼실로 짠 것이라 캔버스 천 같은 빳빳한 맛이 없었다.

그는 마대 뒷면에 물감을 칠했다. 천을 빳빳하게 하려고 했던 이 시도가 놀라운 발견으로 이어졌다. 마대는 올이 성기다보니 의도치 않게 물감이 앞으로 밀려 나왔다. 이렇게 삐져나온 물감이 만들어내는 캔버스 표면이 어떤 붓질도 할 수 없는 추상적인 무늬처럼 여겨졌다.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한 마대 천 배압법(천 뒤에서 물감을 밀어올리는 기법)은 단색화(단색을 사용한 추상화)의 대가 하종현(87)의 평생 브랜드가 됐다.

‘하종현 개인전’이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했다. 현장에 가보니 배압법이 만들어낸 추상화의 변주가 서로 다른 음악 연주를 하듯 3개관에서 펼쳐졌다. 이 작업은 ‘접합’ 시리즈로 불린다. 마대 천과 물감이 한데 붙어(접합) 생겨난 돌올한 물감 덩어리 자체의 느낌이 회화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물감을 밀어 올려 만들어진 바탕색에 색을 새로 칠하기도 하는데, 같은 색뿐 아니라 다른 색을 칠하거나 주걱이나 붓을 사용해 물감 위에서 한바탕 놀기도 한다. 주걱을 써서 위를 향해 기세 좋게 밀어 올리기도 하고 붓을 이리저리 춤추듯 휘돌리기도 한다. 행위 결과에 따라 캔버스 표면은 고요한 밤, 폭풍 치는 한여름, 황홀한 저녁노을 등 다양한 느낌을 준다.

접합 연작인 '접합 21-38'. 국제갤러리 제공

이곳에서 개인전은 2015년과 2019년에 이어 세 번째다. 2019년 열린 전시에서는 빨간색, 파란색 등 단색 색채 작업이 많았다. 색채만 화려했을 뿐 아니라 밀어 올린 물감 층의 끝을 가쓰시카 호쿠사이(일본 에도시대 목판화가)의 파도 마냥 입체적으로 처리하는 등 장식성이 강했다. 배압법은 전통 초상화에서 쓰는 배채법을 연상시킨다. 배채법이 천의 뒷면에도 색을 칠해 앞면의 색상이 살아나게 하는 것처럼 배압법도 앞면으로 올라온 물감이 천체 화면의 기본 바탕색이 된다. 배압법이 갖는 이런 배려의 속성 때문인지 지나치게 장식적인 회화는 접합 시리즈 고유의 맛을 반감 시키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그때와 비교하면 색상과 기법에서 점잖아졌다. 천하를 호령하듯 기세 좋게 치닫기보다는 작은 주걱질을 반복해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새롭게 도전한 ‘이후 접합’ 연작도 대규모로 공개됐다. ‘이후 접합’은 일정한 간격으로 자른 나무 막대를 물감을 묻힌 천으로 감싸는 작업으로 시작해 나무 막대를 이어 붙인다. 막대 사이사이에는 유화 물감을 짜 넣는데, 막대를 붙이는 과정에서 물감이 덩어리째 스며나오며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낸다.

그는 50년 가까이 해온 마대 작업으로 단색화 작가 군으로 분류된다. 단색화는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단색화 전시를 계기로 미술 시장의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 ‘이후 접합’ 연작은 100호(162×130㎝)가 4억원을 호가한다. 3월 13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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