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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우리에겐 코사크의 피가 흐른다”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우크라이나 국가(國歌)는 ‘우리는 코사크의 피가 흐르는 형제임을 보여주리라’로 끝난다. 우크라이나 민속학자 파올로 추빈스키가 1862년 발표한 시에 노래를 붙인 국가는 그 자체가 러시아 탄압의 역사다. 차르 치하 제정 러시아 시대에도, 소련 공산당 독재 시절에도 이 노래는 금지곡이었다. 제정 러시아가 끝난 권력 공백기(1917~1919)에 짧게 존재했던 ‘우크라이나민주공화국’ 시절에만 해금됐다. 무자비한 총칼에도,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도 노래는 죽지 않고 4000만 우크라이나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코사크’는 러시아 방언으로 남쪽 사람들이란 뜻이지만 온갖 탄압과 침략에 저항한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와 정신을 대변하는 단어다. 9세기 몽골의 침략에 물러서지 않고 선봉에 서서 싸우다 전멸한 우크라이나인 전투기병대의 이름이 코사크였다. 코사크는 폴란드의 침공에도, 소비에트 붉은군대의 피의 지배에도 항복보다는 죽음을 택했다. 코사크의 혈투가 벌어질 때 지금의 러시아 모태가 된 슬라브족 일부는 모스크바로 도망가 모스크바공국을 세우고 몽골에 협력하며 목숨을 부지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14일째인 9일에도 별다른 승전보를 전하지 못하고 있다. 유튜브에는 러시아 탱크와 장갑차 앞에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고 ‘당장 내 나라에서 나가라’고 외치는 남녀노소의 시위 동영상이 넘쳐난다. 친서방 세력이 우세한 서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러시아가 강점한 크림반도 인근 도시에서도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항변은 멈추지 않는다.

엄청난 병력과 압도적인 무기 앞에서도 우크라이나인의 가슴은 코사크의 피를 포기할 줄 모른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아무리 뽑아내도 사라지지 않는 엉겅퀴와도 같은 민족이란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역사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1000년 이상을 제대로 된 국가 없이 이리저리 짓밟히고 분단되고 해체됐어도 그들은 코사크 정신으로 언제나 똘똘 뭉쳤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일으킨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는 시작부터 우크라이나에 ‘정신 패배’를 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여성과 노인 자원병까지 나서서 결사항전 자세인 반면 러시아는 침공의 명분도, 승패를 좌우할 군대의 사기도 없기 때문이다.

외신은 러시아 군인들이 스스로 탱크 연료통을 박살 내고 도망치거나 투항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한다. 포로가 된 러시아 병사들은 하나같이 “내가 투입된 곳이 우크라이나인 줄 몰랐다”거나 “투항하겠다”고 말했다. 월등한 군사력에도 러시아군의 전투력은 형편없다. 한마디로 오합지졸이다. 자신을 시리아 내전에 참전했다고 밝힌 한 러시아 직업군인 포로는 우크라이나 전시방송에 나와 “러시아 군인들이여, 민가에 포탄을 쏘라는 지휘관 명령을 거부하라. 그건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다”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인류 역사에서 강인한 정신을 가진 약소국이 대의 없는 강대국을 이긴 일은 수없이 반복됐다. 다윗의 이스라엘이 그랬고, 가깝게는 세계 최강 미국과 맞서 싸운 베트남인들이 그랬다. 아마도 이번 전쟁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는 비극이 될 테지만 우크라이나가 완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그들의 명분에 세계가 동의하고 있어서다.

푸틴의 시계는 러시아인들이 초강력 제재를 견딜 수 있는 시간만큼만,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총탄으론 멈출 수 없음을 깨달을 때까지만 허락돼 있을지 모른다. 하늘과 강을 뜻하는 파란색과 들녘을 상징하는 노란색이 합쳐진 국기처럼 우크라이나에 다시 평화가 오길 바란다.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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