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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차이콥스키 거부해야 하나?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사회 전반에서 ‘러시아 보이콧’이 확산되고 있다. 예술 역시 예외가 아니다. ‘푸틴 지지자’로 유명했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시작이었다.

게르기예프는 1990년 푸틴이 정치에 입문했을 때부터 친분을 다졌다. 30년 넘게 푸틴의 모든 정치 행위를 지지해온 게르기예프는 자신의 예술적 역량과 함께 푸틴의 지원을 등에 업고 ‘러시아 예술의 차르’로 군림했다. 그런 그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입장 표명을 거부해 서구 공연장에서 퇴출당한 것은 당연하다. 네트렙코 역시 비난 여론에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고 항변하며 한동안 무대를 떠났지만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푸틴의 크렘린궁에서 생일 기념 콘서트를 여는 등 각종 혜택을 얻는 한편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에게 기부금을 내는 등 정치적 행위를 드러낸 것은 네트렙코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모든 러시아 음악가의 연주를 금지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어 우려스럽다. 미국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여론 악화로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과의 협연을 취소했다. 레핀의 아내인 스타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푸틴의 열성적 지지자인 것과 관련 있어 보인다. 특히 10, 20대의 어린 러시아 연주자들도 후폭풍을 맞고 있다. 캐나다 공연 기획사가 ‘전쟁 반대’ 입장을 공개 표명하지 않는 러시아 아티스트의 콘서트를 열 수 없다며 20세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말로페예프의 공연을 취소했다. 또한 아일랜드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 역시 5월 개막을 앞두고 러시아인은 참가를 불허했다.

이제 역사 속 러시아 작곡가에게도 ‘루소포비아’(러시아 혐오)의 화살이 날아가고 있다. ‘비창’ 교향곡,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 등으로 유명한 차이콥스키(1840~1893)가 최근 서구 공연장의 연주 레퍼토리에서 잇따라 사라진 것이다.

독일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최근 콘서트에서 차이콥스키의 ‘슬라브 행진곡’을 교향곡 1번으로 바꿨다. 슬라브 행진곡은 19세기 오스만튀르크 압제에 시달리는 세르비아의 투쟁을 응원하는 곡이다. 러시아 태생이지만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휘자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는 오스만튀르크와 세르비아 전쟁 당시 러시아 개입을 정당화한 슬라브 행진곡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연결되는 걸 우려했던 듯하다. 그나마 이것은 점잖은 수준이다. 영국의 카디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일본의 비와코홀이 예정됐던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을 연주 레퍼토리에서 빼기로 했다. ‘1812년 서곡’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침략을 러시아가 격퇴한 것을 기념하는 작품이지만 두 단체는 지금 국제 정세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아일랜드에서는 2개의 대학생 오케스트라가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취소하는 등 당분간 러시아 음악을 연주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어린 러시아 연주자들의 공연 기회를 박탈하고 차이콥스키 같은 거장의 곡을 취소하는 게 우크라이나 연대에 도움이 되는 걸까. 아니라고 본다. 다행히 세계 음악계가 대체로 러시아 음악 취소에 반대하는 한편 대부분의 러시아 예술가에 대해서는 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탈리아 부소니 콩쿠르와 미국 반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가 러시아 참가자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수많은 오케스트라가 러시아 작곡가들의 곡을 레퍼토리에 포함한다고 확인했다. 아무리 전쟁 규탄 목적이라도 음악이 정당하지 않은 차별과 배제에 앞장서서는 안 된다.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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