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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K팝에 필요한 ‘숙성’의 시간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방탄소년단의 RM이 고른 단어는 ‘숙성’이었다. 지난 14일 데뷔 9년 만에 그룹 활동을 잠시 멈추어 가겠다며 꺼낸 말이다. 공식 유튜브 채널 방탄TV를 통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된 ‘찐 방탄 회식’에서 그는 “K팝 아이돌 시스템 자체가 사람을 숙성하게 놔두지 않는다”라고 했다. “(‘Dynamite’ 이후) 방향성을 잃었다”(RM)거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슈가)는 창작의 고통에 대한 호소도 주목받았지만,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건 ‘K팝 아이돌’ ‘시스템’ 그리고 ‘숙성’이었다.

이 단어들의 조합은 꽤 논쟁적이었다. 여기에 ‘(랩 번안하는) 기계’라는 말까지 더해지니 ‘비인간적인 아이돌 시스템’이라거나 ‘대중음악의 병폐’ 같은, K팝이 세상에 존재한 이래 꾸준히 들어온 갖은 비난이 가라앉은 호수 바닥을 휘저은 것처럼 떠올랐다. 자극적인 언어를 걷어내고 나면 충분히 근거 있는 비판도 다수였기에 K팝 업계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사절단이 된 K팝 아이돌 무대는 여전히 눈부시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렇듯, 그 눈부신 빛 아래에는 그만큼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아이돌 연습생 100만명 시대’ 속 10대들의 꿈 대부분은 항로 잃은 부표처럼 흔들리고, 기적처럼 기회를 잡은 이들도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에 닿을 때까지 수년에 걸친 인고와 노력의 시간이 필요하다.

실력과 외모는 물론 인성까지 갖춰 무사히 데뷔를 이룬다고 해도 쉽게 해답을 주진 않는다.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아이돌 콘텐츠 노출도는 이제 ‘잠자는 시간만 빼고’라는 수식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K팝 아이돌은 노래하고 춤추는 무대뿐만이 아닌 자체 제작 콘텐츠와 실시간 라이브를 통해 팬들과 거의 24시간을 공유한다. 공유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빈칸일 리 없다. 한계치를 넘어선 지 오래된 레드오션 속에서 조금이라도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진행되는 각종 대외 활동과 이제는 웬만한 그룹이라면 당연하게 월드와이드로 진행되는 투어, 팬 이벤트가 추가된다. 여기에 곡까지 자신이 써야 하는 처지가 되면 도무지 잠은 언제 자는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사이 우연히 발생한 쉴 틈은 곧 공백기로 인식되며 ‘아직 이럴 때가 아니다’라는 가수와 팬 공동의 합의를 끌어낸다. 목표는 오로지 하나다. 더 빨리, 더 많이.

여기에서 ‘숙성’이 등장한다. 세계에서 사랑받는 한국의 대중음악, K팝의 근간에 놓인 최소비용 최대효과의 원칙 속에 희생된 건 다름 아닌 ‘사람’이다. 그리고 이건 슬프게도 한국의 각종 고질병과 궤를 함께한다. 누군가의 꿈을 담보로 ‘하면 된다’ 깃발을 휘두르며 전진만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좋은 떡잎을 골라 강도 높은 트레이닝으로 빠르게 성장시키는 한국 특유의 엘리트 체육 시스템이나 예술 영재 육성과 영혼을 공유하는 K팝 아이돌 연습생 시스템까지. 속을 익힐 시간이 도무지 부족한 사회는 결국 ‘세계에서 제일 인기 있는 보이 그룹’ 멤버의 입에서마저 숙성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누구보다 인정받았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누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들조차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위기 신호다. 동시에 사실은 모두가 답을 알고 있는 신호다. 지금의 K팝이 효율적인 시스템만이 아닌 가장 중요한 동력인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 볼 때, K팝 ‘숙성’의 시간은 저절로 찾아올 것이다.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냐며 놀라지 말자. 정말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되겠냐고 말하지 말자. 해 보는 척 한 적도 없으니까. 모두가 알면서 외면하고 있던 장막 하나를 방탄소년단이 걷어 올렸다. 이제야말로 똑바로 바라볼 때다. K팝 속 사람을, 사람의 ‘숙성’을.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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