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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매너리즘, 그리고 시간의 저주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발발 초기였던 지난 2월과 상당히 달라져 있다. 상상할 수 없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도발과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당해온 불행, 전체주의적 독재체제 대 민주주의 진영의 대결…. 이런 일들이 지금도 여전히 우크라이나 벌어지고 있지만 이젠 별다른 뉴스거리조차 못 된다.

그보다 우리의 관심사는 세계를 덮친 인플레이션과 불황 공포다.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을 마다하지 않던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소속 서방국가들도 점점 지치는 모양새다. 러시아의 엄청난 물량과 병력에 밀려 돈바스 지역이 무너지고, 서방의 경제 제재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자 전쟁의 승패보다 전쟁이 낳은 부작용을 더 걱정하는 형국이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순간부터 급등했던 석유가격을 잡는 데 총력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독일 전력 생산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던 러시아산 천연가스 문제를 푸는 데 정신이 팔려 있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도를 끌어올리는 데 몰두한다. 우크라이나 무기 공급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는 실정으로 이미 자리에서 물러났다. 서방은 겉으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무한정 지원을 외치고 있지만 속내는 ‘이제 그만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으로 야기된 곡물가 상승, 석유가격 폭등, 원자재·공급망 부족, 이에 따른 세계 주요국의 엄청난 인플레와 저성장 공포…. 임기를 앞두고 선거를 치러 리더십을 결정하는 서방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 모든 우크라이나발 불황의 전조는 감당하기 힘든 짐이다. 이것들을 그대로 방치하면 정권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게 시간이다. 선거로 선출된 권력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원천적 한계를 갖는다. 푸틴처럼 20년 이상 1인 체제를 구축해 국가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독재자에게 민주 진영의 리더십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투표권을 가진 대중이 쉽게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점도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한계 가운데 하나로 지적된다. 지루하게 똑같은 형식과 스타일을 반복하는 ‘재미없는’ 그림에서 유래한 이 말이 ‘지루한’ 동어반복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된 것도 현대적 미디어에 익숙해진 대중의 시선 때문이다. 아무리 쇼킹한 일도 매일 같은 내용이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 도배되면 우리는 쉽게 익숙해진다. 세상의 모든 일이 전혀 새롭지도, 전혀 전율스럽지도 않게 느껴지게 된다.

어쩌면 인간 자체가 애당초 매너리즘에 쉽게 빠져드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어떤 불행도, 어떤 기쁨도, 어떤 행복도 수십번만 반복되면 지루한 일상으로 둔갑시키는 게 바로 사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이 매너리즘의 저주다. 민간인이 노골적인 전쟁범죄에 노출돼 목숨을 잃고 사지가 잘려 나가는 부상을 당해도 6개월로 향해가는 이 전쟁에선 한순간, 단 하루, 단 한 시간에 불과해진다. 유럽연합(EU)은 27일 러시아산 천연가스 사용량을 줄이는 방안에 전 회원국이 찬성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가 8월부터 천연가스 공급을 20% 줄이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맞불을 놓은 셈이다. 바이든 미 행정부도 한동안 뜸했던 우크라이나 무기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미국과 EU의 발표가 “끝까지 매너리즘과 시간의 저주를 넘어서 보겠다”는 노력의 표현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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