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내일을열며

[내일을 열며]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부끄러움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인간은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움 때문에 자신이 속한 무리를 떠나기도 한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간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동서양의 고전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덕목으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라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성경에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뒤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서 인류 역사가 시작됐다고 적혀 있다. 17세기 청교도 시대 영국 목사였던 토머스 왓슨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를 가진 돼지’”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보면 부끄러움이 사라진 듯하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탐욕과 배금주의 문화는 지구적 현상이지만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개발 속에 돈과 출세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유난히 자주 나타나는 학력 위조와 논문 표절 사건은 이런 세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00년대 들어 공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이들 사건은 한국 사회의 곪았던 상처에서 고름이 흘러나온 것이다. 2005년 황우석 서울대 교수와 그 연구팀의 논문 조작 사태, 2006년 논문 표절 의혹 및 중복 게재 등으로 인한 김병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의 사퇴, 2007년 신정아 동국대 교수의 학력 위조 사태는 한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적어도 대학가만큼은 깨끗할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의 믿음을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신정아 사태를 계기로 문화예술계와 연예계를 중심으로 학력에 대한 대대적 검증이 이어져 유명인 수십명의 학력 위조가 드러나기도 했다.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바뀌지 않았다. 2010년대에도 심심치 않게 장관 청문회 때마다 논문 표절 논란이 나왔는데, 문제는 점점 그 기준이 엄격해지기는커녕 더욱 관대해졌다는 것이다. 특히나 객관적인 진실에도 불구하고 ‘같은 편’이라면 부정행위를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해졌다. 표절 문제를 지적 도둑질이자 속임수로 보고 점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해외와 반대로 간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결국 한국에서 영부인의 학력 위조와 논문 표절 사태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난 6일 14개 교수단체로 구성된 범학계 국민검증단은 김건희 여사의 논문들에 대한 자체 검증을 통해 심각한 부정행위들을 일일이 밝혀냈다. 아무리 국민의힘이 논문 검증단에 대해 지난 대선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지지했던 단체라며 ‘물타기’를 시도해도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공정과 정의를 앞세워 대선에서 승리한 윤석열 대통령은 김 여사의 명백한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어떻게 나올까. 아마도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침묵을 지킬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대통령 부부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성공하려면 무슨 수를 써도 용인된다는 인식을 한층 강화할 것이다. ‘돋보이기 위해’ 학력과 경력을 위조하고 논문을 표절해도 한국에선 결코 죄가 안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의 곪았던 상처는 이번에도 고름을 제거하지 못한 채 더 썩어들어갈 것이다.

고(故) 박완서 선생의 단편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의 결말 부분에서 주변 사람들의 후안무치에 몸서리를 치던 주인공은 온갖 종류의 학원 간판을 보면서 왜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곳은 없는지 의문을 표시한다. 1978년에 쓰인 이 소설을 통해 박완서 선생이 말하려는 메시지는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사라진 부끄러움을 배워야 한다.

장지영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jyja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