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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굿바이, 퀸!

강주화 미션탐사부 차장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이야기는 장례식이 열리는 19일까지 계속 요란하게 나올 듯하다. 70년이라는 영국 역사상 최장기 군주 재임 기록을 가진 여왕. 하지만 지구 반대편 민주공화국 한 시민인 나는 별 감흥이 없다. 일본의 식민 지배 역사를 가진 한국민으로서 당연한 비호감일 수도 있다.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왕관처럼 쓰고 제국주의 시대에 숱한 나라를 호령하고 수탈했다.

그 연장선에 엘리자베스 2세가 있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많은 기사와 보도 속에서 엘리자베스 2세 초상화가 담긴 영국 화폐 도안이 바뀔 거란 내용에 잠깐 주목했다. 얼마 전 원화를 영국 통화 파운드로 아주 조금 환전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새 왕이 즉위하면 그 국왕의 얼굴로 화폐 도안을 바꿨다고 한다. 여왕의 뒤를 이은 찰스 3세의 초상화가 화폐에 새로 들어가는 이유다. 3초 정도 그 돈을 영국에서 쓸 수 없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다행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안을 바꾸더라도 구권을 회수하고 신권을 발행하기까지 최소 2년이 걸려서다. 그래도 관행대로라면 현재 유통 중인 동전 290억개와 지폐 47억개에 담긴 여왕의 얼굴은 차츰 새 국왕 찰스 3세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화폐에 현존 인물을 넣는 나라는 드물다.

대부분 국가가 국민 모두의 존경을 받거나 기념하고 싶은 역사 속 인물을 화폐에 담는다. 생존 인물을 넣는 경우는 극소수 독재 국가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감비아 독재자가 자기 얼굴을 지폐에 넣은 적이 있다. 생존 인물을 지폐에 도안한 국가는 영국을 포함한 영연방 56개국들이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피지…. 해당 인물은 모두 엘리자베스 2세였다.

어쩌면 여왕 서거를 계기로 이 나라들이 정치 체제 변화를 추구하면서 각자 역사에 맞는 독자적인 화폐 도안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호주에선 벌써 공화국 전환 논쟁이 불붙고 있다. 호주는 190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영국 국왕이 인가한 총독이 의회 해산권과 의회 법안 승인 및 거부권 등을 갖고 있다. 75년에는 존 커 당시 총독이 고프 휘틀럼 당시 총리를 해임한 적도 있다. 2016년 12월 맬컴 턴불 당시 호주 총리는 엘리자베스 2세가 퇴위한 뒤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연방 국가들 사이에서 식민주의 잔재 청산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지난해 카리브해 섬나라 바베이도스가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선포했고 주변 국가들에 도미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내년에 스코틀랜드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다시 추진한다.

영국 군주제는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왕과 의회의 타협 산물이다. 당시 의회의 압박으로 정치적 권한을 넘겨주고 상징적 존재로 남은 것이 현재 왕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영국 민주주의는 17세기 권리장전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한다. 1세기에 기록된 성경에는 한 무리가 예수에게 던진 질문이 있다. 그들은 당시 로마 황제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가져와 묻는다. “가이사(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화폐에 생존하는 최고 지도자를 새기는 것은 약 2000년 전에 하던 일이다. 영연방 화폐는 그런 시대착오를 반영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마지막 상징인 여왕이 떠나간 지금 영연방은 변화할 때다.

엘리자베스 2세는 선거로 뽑힌 권력이 아니라는 한계를 대중의 선망과 지지로 돌파한 성공한 군주였다. 그러나 군주제는 역사 뒤편으로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에 가깝다. 영연방 국가들이 이번 기회에 식민주의 잔재를 온전히 청산하는 걸 적극 고려해볼 만하다. 이제 여왕의 시대는 끝났다.

강주화 미션탐사부 차장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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