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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음모론 전성시대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지난 2일자 뉴욕타임스에는 ‘어떻게 우파가 좌파가 되고, 좌파가 우파가 됐나’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칼럼니스트 로스 더댓은 “2020년대 미국의 우파는 19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횡행하던 좌파의 덕목을 다 갖추고 있다”고 썼다. 그때의 좌파 ‘덕목’이란 이런 거다. 현대사회의 실상은 국가가 찬양해 마지않는 발전·진보와는 거리가 멀며 국가 엘리트와 기득권 세력에 의해 작동하는 ‘그들만의 리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로 음모론이다.

음모론이란 사실보다는 환상, 논리적 근거보다는 비약적 신념, 보편적 가치보다는 특정집단의 믿음에 기초해 정치·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일부 개인과 집단이 비밀리에 공모해 이 세계를 작동시킨다고 여기는 태도를 총칭한다. 지극히 비관적인 이 관점은 당시 젊은 고학력층을 과격한 혁명주의로 이끈 동력이었다. 미국의 극단주의 히피, 일본 적군파, 독일 바더 마인호프 등은 적으로 지목한 요인들에 대해 폭탄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 이들의 적은 미국 공화당, 일본 자민당, 독일 기민당으로 모두 우파였다.

2020년대로 돌아오면 지금의 미국 정치는 이 비관적 음모론을 둘러싼 찬반 진영의 대결로 정의된다. 70년대 좌파 음모론에 의해 기득권 엘리트로 찍혔던 공화당은 현재 또 다른 음모론의 찬성론자 집합으로 전락해 있다. 정반대로 그때의 히피와 진보적 청년들이 대거 영입된 민주당은 새로운 기득권층, 새로운 엘리트로 지목돼 있다. 50년을 간격으로 한때의 좌파와 지금의 우파가 음모론을 공유하는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이 고학력 진보 엘리트 집단의 비밀 담합에 오염됐으며, 이 오염의 때를 벗겨내는 게 ‘미국을 구하는 것(Save America)’이란 주장을 내세워 갑작스레 공화당 주류로 등극했다. 한 번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2020년 대선에서 패배했음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대선 결과가 조작됐다는 그의 선거 사기 주장은 ‘풀뿌리 중하류 백인층’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다.

얼마 전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집이 40대 음모론 신봉자에 의해 공격당해 그의 남편이 둔기에 맞아 부상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검찰 수사에서 “나는 펠로시가 미국 대선 결과를 조작한 마녀이자 장본인이라 믿는다”고 실토했다. 유명 정치인이 어이없는 공격을 당했음에도 공화당의 ‘큐어넌 주류’는 “당해도 싼 일 아니었나” “범인이 펠로시와 내연 관계가 있던 녀석이다” “단순 치정 폭행 정도 아닐까” 등 입에 담지도 못할 새 음모를 떠벌이며 정치판을 누빈다. ‘트럼프가 미국 사회 전반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큐어넌의 공화당 내 신봉자는 케빈 매카시 하원 대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텍사스주) 등 수도 없이 많다.

음모론이 미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태원 참사가 정부의 ‘마약과의 전쟁’ 때문에 벌어졌다는 둥,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이 한밤중에 고급 술집에서 변호사 30명과 술판을 벌였다는 둥, 온갖 괴담이 인터넷을 타고 돌아다니다 못해 주류 정치인의 입을 통해 재생산되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나치와 동성애자가 지배하는 반(反)그리스도, 악마의 국가를 징벌해야 한다’는 전쟁 슬로건 역시 음모론이다.

음모론의 위력은 그 내용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다. 완전히 허위라도 버젓이, 매우 빠른 속도로, 누구나에 의해 퍼져나갈 수 있는 21세기 첨단 세상의 담론 구조가 이 음모론을 무섭게 만드는 것이다. 범람하는 미디어, 범람하는 SNS, 범람하는 인터넷 플랫폼으로 퍼져나간 음모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팬덤을 만들기 때문이다.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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