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동조, 외침은 창조… 물러서지 마라”

[책과 길]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
마리아 레사 지음, 김영선 옮김
북하우스, 456쪽, 1만8500원

2019년 2월 체포됐다가 보석금을 내기 위해 법원에 도착한 마리아 레사를 카메라들이 둘러싸고 있다. 사진 한 가운데 안경을 쓴 여성이다. 36년 경력의 기자이자 2011년 창간된 인터넷 언론사 ‘래플러’의 대표인 마리아 레사는 필리핀 언론자유 운동의 최전선으로 불린다. 북하우스 제공

202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마리아 레사(60·Maria Ressa)의 회고록이 나왔다. 필리핀 언론의 최전선이라고 불리는 웹사이트 ‘래플러(Rappler)’의 공동 설립자이자 대표인 마리아 레사는 푸틴 정부의 비리를 폭로한 러시아 기자 드미트리 무라토프와 공동 수상했다. 언론인이 이 상을 받은 건 1935년 반나치즘 운동을 하다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독일 잡지 편집장 카를 폰 오시에츠키 이후 86년 만이었다. 마리아 레사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최초의 필리핀인이기도 하다.

회고록은 마리아 레사의 개인사를 따라가며 그 위에 필리핀 현대 정치를 겹쳐 놓는다. 필리핀에서 태어난 마리아 레사는 열 살에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이주해 프린스턴대를 졸업한 후 연구를 위해 필리핀으로 돌아왔다가 언론계에 뛰어들었다. “필리핀이 민주주의 국가로 살아남느냐 아니냐는 언론의 힘, 투명성, 신뢰성에 달린 문제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언론에 몸을 담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는 CNN 기자로 아시아 지역을 취재했으며, 필리핀 최대 방송사 ABS-CBN의 대표를 맡았다. 현재는 2011년 7월 여성 언론인 4명이 공동 창업한 래플러를 이끌고 있다.

그의 언론 경력은 필리핀 독재정권과의 투쟁으로 점철돼 있다. 그의 이야기는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언론 활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 좋은 언론과 언론인이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알려준다.

그는 36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현직 주지사가 기자 32명을 한꺼번에 살해하는 나라에서 방탄조끼를 입고 다니며 보도했다. 그는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30분간 공격한 언론사의 대표였다. 14건의 소송을 당했고, 그에게 구형된 누적 형량은 100년이 넘는다. 체포와 구금을 반복하며 활동하고 있다.

157㎝의 이 여성은 그래도 물러서지 않는다. ‘#HoldTheLine(#물러서지마라)’은 그와 래플러를 대표하는 구호다. “물러서지 마라. 그것은 언론인의 의무다.”

2007년 11월 군부 내 반란군이 마닐라의 페닌슐라마닐라 호텔을 장악했다. 정부는 진압 병력을 동원하기 전에 호텔에서 사람들을 모두 철수시키라고 언론사에 경고했다. 마리아 레사는 기자들이 호텔에 계속 남아 있게 했다. 정부의 말을 따르면 정부가 군대를 들여보낸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부 측 설명만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허위 사실을 가지고 자신과 언론사를 공격하는 국정연설을 하자 몇 분만에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두테르테 대통령님, 귀하의 말은 틀렸습니다. 지도자라면 자신의 정보를 확인해야 합니다.”


책에는 언론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이 강렬하게 표출돼 있다. 그는 “좋은 언론 없이는, 사실과 정보의 건전한 생산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으리라”며 “언론은 하나의 소명이었다”고 말했다. 또 “침묵은 곧 공모”이며 “목소리를 내는 것은 하나의 창조 행위였다”고 했다.

이 회고록은 영웅적인 언론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책 후반부는 페이스북이 어떻게 언론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에 대한 고발로 채워져 있다. 마리아 레사는 자신과 언론사에 대한 온라인 공격을 분석하면서 그 배후에 봇과 가짜 계정, 수상쩍은 웹사이트 등이 협력해 가짜뉴스를 확산시키고, 정치 인플루언서를 통해 그것을 증폭시켜서, 반대자들을 공격하고, 이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형성된 여론인 것처럼 조작하는 ‘정보 작전’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밝혀냈다. 정보전의 주요 플랫폼은 페이스북이다. 필리핀 인구 97%가 페이스북 사용자다.

이 정보전은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를 침공했을 때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가짜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후 두테르테 당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대선, 영국의 브렉시트 등에도 사용됐다. 그는 두테르테를 “페이스북을 성공적으로 이용해서 필리핀의 최고직에 오른 최초의 정치인”으로, 필리핀을 “소셜미디어가 한 국가의 제도, 문화, 대중의 생각에 미칠 수 있는 끔찍한 영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그라운드 제로”로 묘사한다.

“거짓말이 거듭 반복되면서 특정 쟁점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기하급수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독재자 두테르테는 ‘마닐라 제국’의 엘리트 및 과두제 집권층에 도전하는 약자로 그려졌다. 지난 5월 대선에서 마르코스의 아들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사상 최악의 부패로 추방됐던 마르코스를 영웅으로 바꿔놓은 ‘대체 서사’가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라고 본다.

마리아 레사는 필리핀의 사례를 통해 소셜미디어가 권력자들에 의해 가짜 정보와 대체 서사의 확산 수단으로 이용되며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는 민주주의가 천 갈래로 찢겨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다”고, “우리가 가는 길을 당신도 가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세계의 권력자들이 소셜미디어 사용자를 통해 정치를 실행하는 방법을 찾아낸 시대에 진실을 위한 싸움, 사실을 위한 싸움이 얼마나 험난한지,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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