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거대 스웨터… 끝없이 커지는 ‘인간의 욕망’을 보라

조각가 에르빈 부름 국내 개인전
옷을 조각재료로 사용하며 유명세
40년간 사회의 모순 유쾌하게 풀어
수원시립미술관 내년 3월19일까지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조각의 개념을 확장하며 자본주의의 소비지상주의를 풍자해온 오스트리아 조각가 에르빈 부름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을 한다. '옷 조각'은 옷과 천을 겹치고 늘리는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은유하며 전시장에 걸린 11m 거대한 스웨터는 그런 옷 조각 연작의 최신 버전이다.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전시장에 동화 ‘걸리버 여행기’ 속 거인들이 입을 법한 거대한 스웨터가 옷걸이에 걸려 있다. 작가는 저 옷을 ‘조각’이라 명명하며 내놓은 것이다.

오스트리아 조각가 에르빈 부름(68)이 경기도 수원시립미술관에서 국내 최대 개인전을 한다. 최근 현장을 찾아 전시를 보며 놀라게 되는 것은 길이 11m 스웨터 작품이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조각의 개념이다. 이는 나무나 돌, 브론즈 등으로 만드는 덩어리로 표현되는 전통적인 조각 개념을 허문다. 게다가 그 개념은 계속 변했다. 작가가 ‘조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며 그 개념을 확장해온 불면의 나날의 흔적을 전시장 작품들을 통해 확인하는 기쁨이 있다.

부름은 빈과 림부르흐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동시대 조각가로 2017년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 오스트리아 국가관 대표 작가다. 전시를 기획한 박현진 학예사는 “부름의 작업은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유도한다. 특히 소비 지상주의, 비만, 이민과 같은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유쾌하게 풀어내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모순과 불합리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약 40년간 이어져 온 그의 작업은 모두 조각의 본질과 형식에 관한 탐구”라고 밝힌다.

그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서 놀라게 된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유머가 일관되게 흘러 ‘부름 스타일’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30대이던 1980년대 말 옷을 조각 재료로 사용하며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옷을 계속 껴입을 때 신체의 부피가 늘어나며 생기는 양감 그 자체를 조각이라고 명명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이번 한국 전시에서는 아쉽게도 비디오 영상으로만 초기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한 보라색 거대한 스웨터는 계속 진화해온 옷 조각의 최신 버전이다. ‘사순절 천’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2020년 사순절을 기념해 오스트리아 슈테판 대성당 제단에 걸렸다. 사순절은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절을 준비하며 40일간 회개, 자선 등을 행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에는 보라색 천으로 십자가상, 성화, 제단 등을 덮는 전통이 있는데 작가는 이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스킨 조각'과 '납작한 조각'으로서의 회화.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옷을 입은 몸통에 머리와 팔은 없고 두 다리만 있는 ‘네모난 사람’ 연작도 재밌다. 상자 모양의 몸통들은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있는데, 이는 옷이 제2의 피부라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스킨 조각’은 실제 모델의 신체 중 옷을 포함한 표면 일부분을 틀로 만들어 알루미늄 소재로 제작했다. 조각이지만 마치 사람의 피부와 같은 감각을 제시한다. 뚱뚱한 사람을 의인화한 듯한 분홍 컨버터블 자동차도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자동차는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 작가는 그런 상징물을 의도적으로 부풀려 변형함으로써 현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더 크고 좋은 것을 갈망하는 소비 지상주의, 현대 자본주의를 이 ‘뚱뚱한 조각’ 연작을 통해 풍자한다.

'뚱뚱한 차'.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초기의 옷 조각이 보여주듯이 작가에게는 신체 행위도 조각이다. 이는 퍼포먼스 작업인 ‘1분 조각’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관람객들은 작가가 적어 놓은 지시문에 따라 의자, 구멍 뚫린 상자 등 소품을 가지고 행위를 한다. 일상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상상초월의 신체적 구조물이 나온다.

관람자가 관객의 지시대로 행동하는 '1분 조각'의 전시 전경.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작가는 나아가 사진이나 회화조차 조각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사진 조각’이라고 명명한 ‘게으름을 위한 지시문’ 사진 연작이 그것이다. 작가는 속도 중심으로 흘러가는 현대인의 삶에 제동을 걸 듯이 ‘무관심하기’ ‘설겆이 하지 않기’ ‘회사 화장실에서 몰래 낮잠 자기’ ‘하루 종일 TV 보기’ 등의 지시문을 실천하는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작가가 퍼포먼스 하는 자신의 모습을 찍는 방식은 미국 여성 사진작가 신디 셔먼(68) 이래 흔한 방법론이 됐지만, 부름은 이걸 조각의 범주에 넣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부름이 이전부터 신체 행위를 조각의 개념으로 봤다는 점에서 자신의 신체적 행위를 찍은 사진 연작을 조각으로 본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회화는 다르지 않나. 전시장에는 회화 작품들이 나왔다. 얼핏 추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언어를 조형적으로 화면 안에 구성했다. ‘SKIN(피부)’, ‘SOFT’(부드러운), ‘FLAT’(납작한), ‘BULB’(부풀어 오른) 등의 영어 단어가 적혀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텍스트가 적힌 회화가 왜 조각이란 말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뚱뚱한 조각’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작가는 뚱뚱한 조각의 반대 버전으로 납작한 조각을 만들고 싶어 했고 그걸 캔버스 형태에서 찾았다고 한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회화에 적힌 문구는 작가 인생 40년간 끊임없이 고민하며 찾은 조각 개념의 변주를 보여주는 단어들이다.

이처럼 변신하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는 것은 즐겁다. 이는 한국의 작가들 가운데는 작가 인생 초기인 30대에 터뜨린 작품 스타일을 20년 넘게 지속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동시에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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