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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강제징용 협상, ‘반성의 진정성’이 핵심

손병호 편집국 부국장


최근 독일은 몇 달을 버티다 미국과 주변국들의 전방위적 압력을 못 이겨 끝내 우크라이나에 탱크를 지원하기로 했다. BBC 방송의 카트야 애들러 유럽 지역 에디터는 독일, 특히 올라프 숄츠 현 총리가 주변의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막판까지 탱크 지원을 주저한 주된 이유가 ‘역사의 무게(the weight of history)’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으로서 전쟁터에서 곧바로 살상용으로 쓰일 탱크를 보내는 것에 대한 근원적 거부 반응을 의미한다. 게다가 독일은 러시아를 침공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일을 두고두고 반성해 왔다. 전범국으로서의 책무와 역사의 죄과를 되새기는 일은 지도자들뿐 아니라 독일 사회 전반에 흐르는 ‘정신’ 같은 것이다. 독일 의회가 지난달 27일 홀로코스트 추모일을 맞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대형 현수막을 내건 것도 그 정신의 연장선이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놓고 한국과 협상 중인 일본에 아쉬운 게 그런 정신이다. 반세기 전 총리를 지낸 빌리 브란트를 비롯해 숄츠, 또 직전 앙겔라 메르켈까지 독일 지도자들한테 유구히 전해지는 사죄와 반성의 태도, 유대인들이 요구한 것도 아닌데 먼저 현수막을 내걸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의회, 외면하기는커녕 틈날 때마다 전국 각지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순례지처럼 찾아 과거를 반성하는 평범한 시민들. 그런 게 꾸준히 이어져 왔기에 주변국들에 ‘끔찍한 전범국’에서 지금의 ‘훌륭한 이웃’이 됐을 것이다.

요즘 강제징용 협상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양국은 일본 정부 및 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 등 전범기업의 사죄 문제, 전범기업의 피해배상 재단 기금조성 참여 방안 등을 놓고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접점이 꽤 좁혀졌다는 소식도 있고, 실무급에선 할 만큼 했고 더 진전시키려면 고위급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사죄와 피해배상의 주체와 방식이 어떻게든 결론나겠지만, 핵심은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반성에 대한 ‘마음가짐’이 피해자들한테 얼마나 진정성 있게 다가가느냐일 것이다. 그러려면 일본 언론 보도대로 ‘일본 정부의 사과가 과거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담은 이전 담화들을 재확인하는 정도’에 그쳐선 곤란하다. 재확인은 물론, 향후 내각 또는 자민당 인사들에 의해 수시로 뒤집히지 않도록 사과와 반성이 성실히 유지·계승되게끔 할 것이란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런 뜻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직접 밝히면 금상첨화다.

당국 간 협상에서 일본은 전범기업들의 배상기금 참여나 직접 사죄는 어렵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게 사실이라면 피해자들로선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피해자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순 없더라도 적어도 ‘성의’는 보여야 한다. 전범기업들이 직접적인 배상에 나서기 어려우면 최소한 일본 경제단체를 통해 우회적으로라도 배상기금을 출연케 하는 방안 등이 그런 성의일 수 있다고 본다. 아울러 배상금보다 더 중한 게 사죄와 반성인데, 글로벌 위상을 가진 기업으로서 인류보편적 시각에서 피해자들을 달래는 마음을 어떻게든 표하는 게 온당하다.

한·일이 그동안 강제징용 문제로 지나치게 소모적으로 대립했고 양쪽 다 큰 손해를 봐 왔다. 관계 개선을 더는 늦춰선 안 되고, 마침 그렇게 하기 좋은 타이밍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 모두 그럴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하기도 했다. 그런데 찢어진 관계를 단순히 봉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양쪽 모두 입이 닳도록 얘기하는 ‘미래지향적 관계’를 만들려면 조금 더 전향적인 태도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강경한 입장인 피해자들에 대한 설득 노력을 계속 기울이고 있지만, 지금은 한국보다도 일본이 좀 더 움직여줄 때다. 특히 피해자들에게 일본이 전범국으로서의 책무가 있고, 역사의 죄과를 되새기고 있다는 걸 심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합의를 해도 박수를 받고, 징용 문제 해결 이후의 수순인 정상회담과 셔틀외교 복원의 명분도 생길 것이다. 우리 정부도 기존 협상틀 내에서 묘수 찾기에만 매달릴 게 아니라 과거사를 대하는 일본의 근본적인 태도에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꾸준히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징용 문제가 합의돼도 뭘 주고받는 ‘딜’이 아니라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는 초석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손병호 편집국 부국장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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