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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눈에 선하게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지난해 개봉해 726만 관객을 모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후반부 해상전투 장면에 한글 자막을 넣어 화제가 됐다. 자칫 대사가 묻혀 잘 전달되지 않을까 고민 끝에 자막을 썼다는 게 김한민 감독의 설명이었다. 장애인 관객에게 반가운 새 시도라는 평도 있었다. 그런데 대사에 의지해 극을 이해하는 시각장애인에게 자막은 소용없으니, 이들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통째로 놓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홍미정 작가의 역할이 없었다면 말이다.

“화살과 포가 날아다니는데 조선 수군이 쏜 건지 왜군이 쏜 건지, 전투는 누가 이기고 있는지 화면을 보는 저도 헷갈리는 거예요. 중간중간 화면을 멈추면서 장면을 설명했어요.” 그는 화면해설작가다. 현재 50명 정도가 활동 중인 것으로 추산되는 흔치 않은 직업이다. TV 프로그램이나 영화 등의 영상물에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등장인물의 표정과 동작, 풍경처럼 대사 없이 처리되는 장면을 설명한다. 화면해설작가가 원고를 써서 넘기면 성우가 원고를 낭독해 대사와 대사 혹은 내레이션 사이의 빈 곳을 채워 넣는다.

국내 첫 화면해설 시험 방송이 2001년 MBC ‘전원일기’ 1000회였는데 여전히 화면해설방송이 낯선 건 제작되는 프로그램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사별 화면해설방송 의무 편성 비율은 연간 5~10%다. 넷플릭스가 모든 오리지널 프로그램에 화면해설을 하는 데 비해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적용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화면해설방송이 재방송용 위주로 제작되고 낮이나 심야 시간대에 편성되기 때문에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아주 초창기에는 드라마 짝수 회차만 화면해설을 제작하고 홀수 회차는 안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도 2025년까지 단계적으로 VOD와 OTT에도 화면해설 의무화가 추진돼요. 고무적이기도 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고요.”

홍 작가는 영화 ‘올빼미’ ‘암살’ ‘말모이’, 예능 ‘미운 우리 새끼’, 애니메이션 ‘구름빵’ 등을 맡아온 12년차 베테랑이다. 넘치는 해설은 귀가 피곤하고, 간단한 해설은 서운함을 불러온다며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게 하는 화면해설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가 동료 작가들과 함께 펴낸 책 제목이 그래서 ‘눈에 선하게’다. ‘한국인의 밥상’처럼 내레이션이 많은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쉽고 ‘런닝맨’처럼 계속 뛰어다니거나 게임을 하는 예능은 작업 시간이 배로 든다거나,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타조 얼룩말 캥거루 거미 도요새가 줄줄이 짝짓기하는 바람에 적나라하지도 않고 두루뭉술하지도 않은 문장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는 얘기에 웃음이 났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도 처음에는 교통 약자를 위해 생겼지만 지금은 모두가 이용하죠. OTT 자막 서비스도 청각장애인을 위해 시작했지만 이어폰을 안 꽂고 자막으로 보는 분들도 많고요. 화면해설방송도 다른 일을 하면서 들을 수 있으니 비시각장애인도 즐길 수 있어요.” 홍 작가는 시각장애인 전문 프로그램인 KBS 3라디오 ‘우리는 한가족’과 ‘심준구의 세상보기’의 방송작가이기도 하고, 대학원에서 미디어 취약계층에 대해 공부할 만큼 이 일에 진심이다. 그러면서도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반응에는 쿨하기만 하다.

“돈을 받지 않고 하는 일이라면 그건 진짜 좋은 일인 게 맞고요, 저는 돈을 받는 직업인이니까요. 저희 일을 좋은 일의 영역으로만 아니라 함께 보기 위해 필요한 일로 봐주셨으면 해요. 내일이 ‘아는 형님’ 마감날이거든요. 저녁 6~7시에 영상을 받아서 내일 아침 9시에 넘기는 일정이라 꼬박 밤새 써야 돼요. 그럼 이만 또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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