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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대도 조세형

고세욱 논설위원


‘가난한 사람 집에서는 훔치지 않는다’ ‘나라 망신을 생각해 외국인 집엔 들어가지 않는다’ ‘훔친 물건의 30∼40%는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쓴다’ ‘절도범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검사나 판사 집은 노리지 않는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1998년 6월 5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보호감호처분 재심 2차 공판에서 조세형이 언급한 일종의 도둑 철학이다.

조세형은 1970~80년대 초 경제부총리, 전직 국회의원, 기업 사장 등의 집을 털면서 당시 서민들에게 힘있는 이들을 응징한 의적과 같은 대접을 받고 대도(大盜)로 불렸다. 도둑 철학은 83년 구치소에서 탈주하다 잡힌 뒤 징역 15년에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던 조세형이 재차 관심을 얻은 계기였다. 그가 98년 11월 석방되자 스타의 귀환을 연상케 했다. 무수한 예능 및 시사 프로그램이 그 앞에 줄을 섰다. 예비 경찰들에게 강연하고 국내 최대 보안업체 자문위원으로도 초빙됐다. 16세 연하의 중소기업 업체 사장과 결혼까지 하면서 제2 인생은 만개하는 듯했다.

그의 면모는 인기를 얻은 뒤에 드러났다. 2000년 사업차 간 일본 도쿄에서 주택을 털다 붙잡혔다. 그는 “일본 보안 시스템을 점검하기 위해서”라고 변명했다. 2004년 출소한 후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6차례 절도 행각 등을 벌이며 구속, 복역을 반복했다. 다세대 주택을 털고 무기를 휘두르는 등 그의 도둑 철학도 빛이 바랬다. 대도가 아닌 도벽이 강한 좀도둑인 셈이다. 최근 85세의 조세형이 전원주택에서 금품을 훔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이제 더는 죄짓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90년대 법정에서 “스스로 의적이나 대도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못난 도둑놈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빈부격차, 부정부패의 사회가 부른 영웅에 대한 갈증이 그를 대도로 만든 것일까. 86세에 출소할 그가 이제는 인생 말년을 조용히 보냈으면 한다. 대도라는 평판의 무거움을 내려 놓으면서.

고세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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