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사쿠라’ 삼천리 화려강산


우리는 예로부터 꽃을 매우 좋아하는 민족이다. 음력으로 춘삼월이 되면 개나리 진달래 목련 철쭉 매화 등이 필 때 마을마다 화합과 풍년을 기원하는 꽃 잔치를 열었다. 우리 민족의 꽃 잔치에는 어느 꽃이 인기를 독차지하지 않았고 꽃 사이의 우열 의식도 없었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등 우리 민족 곁에서 함께 피고 지는 모든 꽃을 사랑하고 즐겼다. 무궁화도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소박하고 아름다운 꽃 잔치 문화가 사라지고 벚꽃으로 불리는 요란한 사쿠라 축제로 대체되었다. 정치 1번지인 여의도는 물론이고, 이순신 장군의 얼이 살아있는 진해를 비롯해 경남 하동 쌍계사 10리 길과 일제가 호남의 쌀을 수탈해가던 전북 전주와 군산 가도 100리길, 그리고 신라 천년 왕도인 경주까지 모든 길을 사쿠라가 점령했다. 우리나라의 봄은 사쿠라 축제 일변도로 변해 버렸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무궁화를 모두 뿌리째 뽑아 불사르고 씨를 말린 사실은 다 아는 일이다. 바로 그 자리에 1960년대부터 민족의식이 없는 재일교포와 문화 침략을 꿈꾸는 일본인들이 조직적으로 한국에 사쿠라 심기를 조장했다. 여의도 국회 뒤 한강 변 길에 있는 사쿠라는 1970년대 재일교포가 기증했다. 채만식의 문학 혼이 숨 쉬는 전북 군산 월명공원에도 일제가 우리나라의 소나무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사쿠라를 심었는데, 그 나무의 수명이 다하자 일본 로터리클럽에서 다시 기증했다. 그리고 진해에는 1966년부터 지속해서 재일교포 그룹이 사쿠라 6만 그루를 기증하면서 시내를 온통 사쿠라 천지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 반성을 모른다. 그들이 얼마나 우리 민족의 상징인 무궁화나 소나무를 미워하고 뽑아버렸는가를 기억한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 사쿠라 심기를 강요하고 조장했는가를 깨닫는다면, 재일교포는 물론이고 도비 시비 국비를 들여서 사쿠라를 심고 축제를 부추긴 사람들은 반성해야 한다.

그 옛날 도산 안창호 선생은 웅변할 때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책상을 두드리면서 “우리 무궁화동산은…” 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 애국가의 가사대로 우리나라는 예부터 무궁화로 뒤덮인 삼천리 화려강산이었다. 옛날에는 무궁화를 근화(槿花)라고 불렀는데, 중국의 고금기(古今記)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지방이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이 피었더라(多木槿花)”는 기록이 있다. 대략 4세기부터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만발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신라를 소개하면서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의 나라라고 불렀다. 실제로 신라 화랑들은 모자에 종이나 헝겊으로 만든 무궁화를 꽂고 훈련했다. 이는 고려시대까지도 이어졌는데 제16대 왕 예종(睿宗)도 고려를 가리켜 근화향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게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무궁화는 어사화(御賜花)라고 불렀다.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종이 무궁화를 모자에 꽂아 주어 생긴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궁중 잔치를 진찬이라고 하였는데 신하들은 모자에 무궁화를 꽂고 임금께 음식을 바쳤다고 하여 무궁화를 진찬화(進饌花)라고도 불렀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사쿠라 천지가 되어버렸는지…. 우리나라를 다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으로 만드는 일은 예전의 한서 남궁억 선생처럼 교회가 앞장서야 할 중요한 계몽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시 만든 ‘무궁화동산’에서 우리 민족에 의한 무궁화 축제를 즐길 수 있는 날을 기원한다.

문성모 목사(한국찬송가개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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