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에 긍휼의 마음을 흘려보내다… “의료진은 치료의 페이스메이커”

‘페이스메이커스 운동’ 펴는 채영광 미국 시카고 노스웨스턴 의대 교수

채영광(왼쪽) 미국 시카고 노스웨스턴 의대 교수가 병실에서 암 치료를 잘 받고 있는 환자를 응원하기 위해 보호자, 의료진과 함께 상장을 전달하고 있다. 아래는 폐암 완치자 앨버트 큐리의 모습. 페이스메이커스 제공

앨버트 큐리(Albert Khoury)는 폐암 가운데서도 희귀암인 점액성 선암종이었다. 50대 나이에 양쪽 폐에 암이 퍼졌고, 여러 가지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호흡곤란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그는 미국 시카고 노스웨스턴 의대 종양내과 채영광(46) 교수에게 폐 이식 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말했다. 4기 폐암은 이식 대상이 아니다. 말기암 환자보다 더 나은 사람들에게 장기 이식의 기회가 돌아가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큐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채 교수에게 “지금까지 갔던 모든 병원에서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준 적이 없었지만, 여기서 새로운 폐를 이식받아 암에서 완치되고 싶다”고 말했다. 아무도 이 환자의 말을 경청해주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채 교수는 마음을 바꾼다. 양쪽 폐 이외엔 암이 퍼진 곳이 없으니 조직검사를 해서 흉부에 위치한 임파선에 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면 이식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후의 일은 섭리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코로나19 와중에 폐 이식을 통해 환자를 소생시킨 흉부외과 전문의 둘을 채 교수가 복도에서 만나 수술 스케줄을 잡은 일, 큐리가 두 달에 걸쳐 시행된 폐 이식 가능 여부 검사를 모두 통과한 일, 큐리가 다시 기흉과 패혈증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해 호흡 곤란으로 기도 삽관을 하는 등 위급한 상황을 맞이했으나 때마침 뇌사자에게서 기증된 폐가 도착해 인공호흡기를 단 채 수술실로 향한 일 등등. 이식 수술 후 양쪽 폐로 자유롭게 호흡하는 큐리는 십자가 목걸이를 한 모습으로 영상에 나와 말한다.

“다른 의사들은 모두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는데 닥터 채만이 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중환자실에서 죽음 앞에 혼미하던 순간에도 마음속으로 예수님 이름을 외쳤습니다. 저와 제 가족 모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수술 후 6개월이 지나 병원은 그를 위해 축하 파티를 열었다. 큐리의 이야기는 시카고 트리뷴 1면을 장식했고 ABC BBC 방송에서도 보도했다. 지금은 페이스메이커스(pacemakerstogether.org) 홈페이지에서 그의 영상을 만날 수 있다. 페이스메이커스는 채 교수와 연구팀이 운영하는 스토리텔링 플랫폼이다. 고된 치료의 마라톤을 달리고 있는 환자와 보호자 옆에서 의료진이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다독이며 끝까지 완주하도록 돕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자는 취지다.

2~3분 진료를 위해 오래 대기하거나 퉁명스런 말투로 의료진에게 상처받았던 환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하며 그들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미국과 한국의 병원 모두에서 긍휼의 마음이 퍼져 나가길 바라는 운동이다. 지난 9일 방한한 채 교수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미국 임상시험그룹(SWOG) 희귀암위원회 부의장인 채 교수는 “환자에게 치료 과정은 질병과의 전쟁이라기보다 페이스를 조절해야 하는 마라톤”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의학 치료가 잘 듣지 않는 암 환자들을 돌보는 종양내과 전문의로서 여러 임상시험을 합니다. 저 같은 연구자의 입장에선 질병과의 전쟁이 맞습니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이겨 신약을 개발해 환자의 생존율을 두세 배 높이는 승리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건 연구자의 입장이고 환자들도 같은 메타포를 공유하는 건 아닙니다. 환자들이 ‘암과 싸워 이기겠다’ ‘나는 워리어(warrior)’ 하는 것보다는 마라톤을 뛰는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항암 치료라는 마라톤을 뛰는 환자 옆에서 의료진은 페이스를 조절해 드리며 같이 뛰는 페이스메이커입니다. 간호하며 지치기 일쑤인 보호자들께도 늘 응원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감사하자고 말씀드립니다.”

채 교수는 먼저 암은 환자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말한다. 위험 인자가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평생 골초였던 윈스턴 처칠은 폐암에 걸리지 않았지만, 평생 흡연을 하지 않은 옥한흠 목사는 폐암으로 돌아가셨음을 떠올린다. 폐암의 15% 정도는 비흡연자에게 발생하며 암의 위험 인자를 굳이 따지자면 연령, 곧 나이라고 말한다. 질병에 관해 자책하고 억울한 마음에 주변을 탓하고 심지어 신앙을 부정하는 이들도 나온다. 그럴수록 채 교수는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동행하시는 주님의 이야기를 병실에서 전하게 된다고 밝혔다.

채 교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될까요?’(두란노)의 저자이다. 말기암 환자들을 돌보는 진료실에서 저 말을 건넨 뒤 환자가 원하면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한다. 본인의 자아를 비운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고 그걸 환자들에게 계속해서 흘려보낸다. 페이스메이커스 운동은 신앙의 색채를 본격적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진료실에 환자를 향한 주님의 긍휼의 마음이 퍼져나가길 원하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홈페이지 모습.

영어로 인터뷰하는 페이스메이커스 영상에 최근 김범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교수의 우리말 인터뷰가 게재됐다. 김 교수는 채 교수와 서울대 의대 동기동창이다. 김 교수는 서울대 암병원 20년차 전문의로 암환자들의 마지막을 다룬 에세이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를 저술했다.

채 교수와 종교는 다르지만 의료진이 환자들의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돕는 페이스메이커라는 점에 김 교수도 깊이 공감한다. 그는 “암 진단과 치료의 과정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며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현재(present)라는 선물(present)을 놓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한국을 방문한 채영광 교수가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스튜디오에서 페이스메이커스 운동을 말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채 교수는 지난해 국민일보 저자와의 만남(2022년 9월 2일자 36면 참조) 이후 반년 만에 방한했다. 한국과 미국의 병원에서 환자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흘러넘치길 바라던 기도제목 그대로, 서울대 의과대학 의과학자 양성 프로그램 패널 참여, 서울 사랑의교회와 서울대 병원교회 예배, 안양 샘병원 간증 등을 통해 이야기를 공유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채 교수는 의사로서 환자에게 “당신이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좋아지길 바랍니다. 부작용 없이 잘 치료받기를 바랍니다 등을 수시로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의과대학 시절엔 의사의 자질에 관해 항상 객관적인 위치에서 냉정하게 일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환자에게 잘못된 희망을 심어주어서도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감정적 번아웃을 피하려면 환자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함께 우시는 예수님’을 만난 뒤로 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환자와 함께 우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말합니다. ‘저 의사가 진짜로 환자인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구나’라는 믿음을 심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끝까지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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