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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희귀질환, 20년 전과 지금


20년 전의 일이다. 2002년 여름 어느 날 광주의 한 가정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의학기자로 갓 입문한 필자의 눈귀를 붙잡았다.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아들이 ‘더 이상 고통 속에 살고 싶지 않다’며 “죽여 달라”고 하자 같은 병을 겪던 아버지가 아들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이 부자가 대를 이어 ‘윌슨병’을 앓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얼마 뒤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윌슨병이 아닌 ‘척수 소뇌실조증’을 앓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해당 가족은 자신들의 삶을 오랫동안 옭아매 온 병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희귀질환과 유전자 검사에 대한 인식이 낮았고 전문가도 손에 꼽을 정도여서 치료는커녕 진단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국내에 이런 희귀질환이 몇 종류, 몇 명이나 있는지 국가 차원의 현황 파악도 거의 안돼 있었으니, 정부의 지원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을 리 만무했다. 요즘처럼 질병 정보를 얻거나 환자·가족에게 정서적으로 힘이 돼 주는 환우회도 활성화돼 있지 않던 때였다. 희귀질환자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소뇌실조증 부자의 비극은 적지 않은 울림을 낳았고 우리 사회에 희귀질환의 존재를 알리는 촉매가 됐다. 당시 다른 언론에 앞서 희귀질환의 실태, 환자·가족들이 겪는 고충을 조명하는 장기 시리즈 기사를 내보냈던 기억이 난다. 1년여 동안 100종 넘는 희귀질환을 발굴했고 수많은 환자를 만났다. 지면을 통해 많은 사람이 ‘세상에 이런 병도 있구나’ 하고 관심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환자단체와 국회의 노력이 더해져 2015년 마침내 희귀질환관리법 제정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해당 법을 기반으로 희귀질환의 정의(유병 인구 2만명 이하)가 규정됐고 질환자 등록사업, 의료비 지원, 전문기관 지정, 의약품 개발, 전문인력 양성 등이 체계적으로 추진됐다. 질병관리청에 희귀질환 정보를 제공하는 ‘헬프 라인’도 생겼다.

20년이 지난 지금, 희귀질환자들이 처한 환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과거에 비해 사회적 인식이나 국가 지원 체계가 많이 개선된 건 맞지만 여전히 사각지대가 존재해 안타깝다. 특히 정부 지원의 첫 관문인 희귀질환 지정 제도의 허점 탓에 적지 않은 이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희귀질환자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중증질환 산정특례제도(본인 부담 10%), 의료비 지원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혜택을 보려면 먼저 희귀질환 지정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희귀질환의 ‘정의’와 ‘지정’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고 동일 질환 내에서도 선천성과 후천성에 따라 지정 여부가 갈리는 게 현실이다. 대표적으로 ‘전신농포건선’과 ‘후천성 단장증후군’이 있다. 전신농포건선은 온몸에 고름·물집이 생기는 심각한 증상이 반복되며 삶의 질을 크게 위협한다. ‘중증 보통 건선’ 등 국가 지원을 받고 있는 다른 피부질환보다 중증도가 훨씬 더 높다고 전문 의료진이 인정하고 있는데도 희귀질환 지정이 5년째 미뤄지고 있다. 얼마 전 국회 토론회에 2018년 처음 해당 질병을 국가 지원 질환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한 40대 환자가 나와 미지정에 따른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장염 등으로 수술적 절제를 해서 소장의 길이가 짧아진 단장증후군은 ‘2차성 질환’이라는 이유로 역시 희귀질환 인정을 못받고 있다. 동일한 증상과 고통, 질병 부담이 따르는 선천성 단장증후군은 희귀질환으로 지정돼 있다. 국가 관리 희귀질환이 아니면 치료제가 있어도 건강보험 급여 혜택에서도 배제된다.

20년 전 한 가족의 비극이 기폭제가 돼 희귀질환자에 대한 국가 관리 기반이 마련됐으나 아직도 지원망 밖에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우리 이웃으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보다 촘촘한 정비가 필요하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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