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동원 (4) 미국서 목사 안수 받고 귀국… 영원한 동역자 아내와 결혼

약혼자 명자 자매의 격려로 미국 유학길
‘학교 첫 한국인’ 책임감으로 열심히 공부
최대의 영예인 ‘그 해의 설교자상’ 수상

이동원 목사와 우명자 사모가 1975년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결혼식 화촉을 밝히고 있다.

낮에는 기독봉사회와 10대 청소년 모임인 십대선교회(YFC)에서 일하고 저녁엔 한국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직도 휘청거리는 가난한 집안을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약혼자 명자 자매의 격려가 유학을 결단하도록 했다. 기독봉사회 책임자였으며 미국 국제기독실업인회(CBMC) 회장을 지내신 실업가 예거(Yeager) 장로님의 도움으로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다.

자동차 도시인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자리 잡은 작은 신학교인 디트로이트 바이블 칼리지(후일 윌리엄 틴데일 칼리지)에서 첫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신학교 규모는 작았지만 교수진은 탄탄했다. 후일 댈러스신학교 부총장이 된 웬델 존스톤, 탈봇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 헨리 할러먼 교수, 세계적 변증학 교수가 된 노먼 가이슬러가 가르치고 있었다. 학교 사상 첫 한국인이라는 책임감으로 열심히 공부해 우등생 반열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 학교 최대의 영예는 졸업반 학생 중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뽑아 채플 설교를 하도록 한 뒤, 한 학생을 선정해 ‘그 해의 설교자(Preacher of the year) 상’을 주는 전통이 있다. 졸업식에서 그 상을 받았는데 후에 설교자로 살아갈 내게 큰 격려가 됐다.

내친김에 계속 신학 연구를 하고 싶었지만 우선 귀국해 일하다 다시 공부할 수 있다고 하신 김장환 목사님의 권고를 따랐다. 유학 생활에서 느낀 향수, 사랑하는 약혼자와의 결혼 문제도 시급했다. 사실 처음 유학을 떠날 땐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충실하게 전할 전도자로서의 준비만 생각했지 목회까지 생각하진 않았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에베소와 골로새서를 비교연구 했다. 둘은 쌍둥이 서신으로 교회론을 다루고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영광이 마음을 크게 두드렸다.

김 목사님과 상의한 나는 미국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귀국했다. 1975년 여름 1차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청년 사역을 시작하면서 수원중앙침례교회 부목사로도 사역했다. 물론 여러 해 기다려준 명자 자매와 교회에서 김장환 목사님 주례로 결혼했다. YFC 제자들이 신혼 가방에 개구리를 잡아넣어 첫날 밤을 개구리 소동으로 밤을 새운 것도 역경이라 할 수 있을까. 신혼여행은 당시 YFC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도시들을 돌며 학생 집회를 겸했다.

나는 다시 학생 전도에 매달리며 교회를 섬겼다. 이전과 달랐던 것은 아내와의 동역이 제공하는 심리적 안정감과 행복 덕분에 사역이 훨씬 효율적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현숙한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잠언 기자의 증언(잠 19:14)을 경험했다. 처가에서 막내였던 아내는 여섯 명의 시동생, 층층으로 웃어른이 있는 가난한 집의 맏며느리가 된 것이다. 아내는 온갖 어려움을 말 없는 인내와 기도로 감당하며 나의 든든한 응원자가 됐다. 한 여인과의 동행이 이렇게 삶을 바꿀 줄은 정말 몰랐다. 아, 행복한 동행이여!

정리=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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