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헬라어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크로노스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주관적 시간을 뜻한다. 그런데 이 단어들의 어원이 독특하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의 이름과 같다.

‘신화’는 고대인이 자신들의 기원 및 역사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지혜를 전달할 목적으로 각색한 독특한 장르다. 그렇다면 이 두 단어에 대한 고찰을 통해 ‘시간’에 대한 서구의 옛 지혜를 엿보는 것과 함께 이에 대조되는 성경의 지혜 역시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먼저 크로노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이다. 그런데 우라노스가 그 사이에 낳은 자식들을 감옥에 가두어 댄다. 이에 막내 크로노스는 어머니와 결탁해 아비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크로노스가 그렇게 얻은 왕위에 집착해 아비가 가두어 뒀던 다른 형제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가이아는 “너도 네 아비처럼 자식에게 당할 것”이라고 저주한다. 두려움을 느낀 크로노스는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집어삼켜 버렸다. 그런데 살아남은 막내 제우스가 장성한 뒤 돌아와 아비를 패퇴시키고 올림포스의 왕이 된다.

카이로스는 제우스의 막내아들로서 ‘기회의 신’이라고 불리는데 그 생김새가 독특하다. 앞머리는 덥수룩한데 뒤는 대머리다. 때문에 앞에서 그를 마주하는 자는 그의 정체를 잘 알아채지 못하나 알아채기만 한다면 머리를 잡아챌 수 있다. 그러나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면 끝이다. 뒤돌아서 붙잡으려 해도 잡히는 게 없어 놓치고 만다.

두 단어를 통해 이 신화는 비록 시간이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졌지만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붙잡느냐에 따라 그 시간은 어차피 소멸할 크로노스가 될 수도 있고, 카이로스가 될 수도 있다는 지혜를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현대의 신화인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지혜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결국 당신이 시간의 주인으로서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성경은 이를 일축한다. ‘전도서’의 전도자는 시간을 ‘헤벨’이라고 한다. ‘헛되다’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연기 같다’는 뜻이다. 시간은 연기와 같아서 존재하지만 결코 잡을 수 없고 그 패턴을 전혀 알 수도 없으며 이내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헤벨과 같은 시간을 잡으려는 노력조차 역시 헤벨이라는 것이다. 완벽한 반박이다. 나아가 성경 전체가 이런 시각을 전제로 시간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이 두 단어에 대한 당시의 사전적 정의를 공유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지혜를 지향한다. 즉 크로노스는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닌 시간 밖에 있는 존재로서 시간을 창조하신 분께서 선사하시는 것이고, 그분께서 그리하실 때에야 비로소 ‘카이로스가 된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시간에 속박당한 존재인 인간은 카이로스는 고사하고 크로노스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저 다가오는 시간을 마주할 뿐이다.

다만 우리가 카이로스를 만들어 낼 수도, 알 수조차 없음이 분명함에도 카이로스를 막는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카이로스를 인간과 함께 만들어 가길 원하시는데 만약 우리가 그런 성품에 반대되게 나온다면 그것이 카이로스의 걸림돌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며 ‘거룩’하신 그분의 성품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일까. 미움과 부정의인가. 아니다. 바로 사랑의 이름으로 정의를 무력화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사랑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는 과연 어떠한가. 카이로스는 우리가 무엇을 더 크게 외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그저 시간의 진정한 주관자에 대한 우리의 철저한 고백 아래, 오늘 무엇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부디 한국교회가 카이로스의 마중물이 되길 소원한다. 사랑과 정의를 통해.

손성찬 목사(이음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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