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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밟히셨나, 손 잡고 가시게… 58년간 해로하고 같은 날 별세

눈에 밟히셨나, 손 잡고 가시게… 58년간 해로하고  같은 날 별세 기사의 사진

정지남 할아버지·정계순 할머니

2010년 1월 11일

“할머니∼∼∼할아버지∼∼∼!!” 조용했다. 경남 하동군 하동읍 버스터미널 뒤편 2층집 현관문을 요양사 오인숙(39·여)씨는 더 세차게 두드렸다. 사흘 전 왔을 때 할머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이 빠끔 열렸다. “왔어?”

할아버지였다. 오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단 둘이 사는 노부부는 거실에 나란히 누워 늦잠을 자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두 분을 돌보기 시작한 뒤 이런 일은 처음이다.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오씨를 위해 문을 열어두었다.

할머니는 그새 기력이 더 쇠약해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힘들어했다. 할아버지는 “밥 먹어”라며 할머니를 부드럽게 부축했다. 11일 오전 8시40분, ‘병원에 연락할까….’ 오씨는 잠깐 생각했다.

만남

정지남(90) 할아버지와 정계순(84) 할머니는 1942년 만났다. 스물둘과 열여섯 청춘남녀는 중매쟁이가 몇 차례 드나든 뒤 혼례를 치렀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 두 사람 모두 하동 토박이다. 교사인 할아버지가 경남 함안 마천중학교 분교장으로 전근했을 때를 빼면 평생 하동읍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수학 선생님이었다. 하동중학교 하동고등학교 금남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6남1녀를 뒀다. 7남매 중 6남매가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때 그에게서 수학을 배운 제자다. 자식 친구도 대부분 그렇다.

제자들이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꼬장꼬장한, 전형적인 수학 선생님”이었다. 자식이라고 봐주는 법 없고, 교사 승진시험은 모두 만점을 받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그런 할아버지가 유일하게 부드러워지는 상대는 할머니였다.

7남매 중 몇몇은 중학교 수학여행을 어머니와 함께 갔었다. 30대 후반이던 아버지는 3박4일 수학여행을 인솔하며 아내를 데려갔다.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 어머니의 “유별나다”는 타박도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1월 13일 오전

오전 9시. 배를 움켜쥔 채 누워 신음하는 할아버지를 요양사 오씨가 발견했다. 나란히 누운 할머니는 잠이 든 듯 기척이 없다. 할아버지 신음에 할머니 부르는 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귀 어두운 할머니를 깨우기엔 너무 작았다.

할아버지를 태운 구급차가 하동삼성병원으로 갔다. 복부동맥파열. 하동 사는 친척이 더 큰 병원을 찾아 진주(경남)로 할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오씨가 서울과 포항에 사는 6남1녀에게 연락하고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 상태도 좋지 않았다. 다시 구급차를 불러 하동삼성병원으로 갔다. 저혈당 쇼크. 포도당 주사를 맞은 할머니는 일반 병실에 누웠다.

천생연분

“찐기미(민물새우)를 아주 잘 잡았지.” 동료교사였던 이대영(76)씨는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유도와 정구를 즐긴 활달한 사람, 그리고 매사에 빈틈이 없는 완벽주의자로 기억했다.

“여든 넘어서도 집 밖에 나설 때는 수수하게 화장하신 분이야.”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를 가리켜 유난히 깔끔한 노인이라고 했다.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서도 의식을 찾고 나선 “속옷 안 가져왔다”고 걱정했다고 한다.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와 깔끔한 할머니. 쉰여덟 해를 함께 사는 동안 부부는 특별했다. 할아버지의 조카며느리 유미순(55)씨는 “서발(세 발짝)만 나가도 (두 분이) 같이 가세요”라고 했다. 노부부는 ‘잉꼬부부의 전설’을 하동읍 부용마을 구석구석에 남겼다.

술을 즐기지 않은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난 키우고 분재 가꾸기를 좋아했다. 집에서도 떨어지는 법 없이 항상 거실에 함께 누워 하루를 보냈다. 서울과 포항의 아들 딸 집에 가도 이틀을 못 넘기고 돌아갈 만큼 둘만의 생활을 즐겼다.

할머니는 금요일마다 요양사 오씨에게 “주말에 신랑하고 잘 지내다가 월요일에 와. 나는 사이좋게 아주 잘 지내”라고 말했다. 6남1녀 중 막내아들은 할머니가 마흔둘에 본 열 살 터울 늦둥이다. 차남 호(60)씨는 “자식들이 섭섭했을 정도로 아버지는 애처가, 공처가였다”고 했다.

노부부의 호칭은 항상 “여보”였다. 외출할 때는 언제나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았다. 90세 할아버지와 84세 할머니가 서로 “여보”라 부르며 손잡고 동네를 거니는 모습. 할아버지가 항상 할머니보다 2보 앞서 걷는 나라에서 이례적인 풍경이었다. 특히 이곳 경상도에선.

1월 13일 오후

정오. 링거를 다 맞은 할머니가 정신을 차리곤 “집에 문이 열려 있을 텐데…”라고 했다. 눈빛이 맑았지만 차남 호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난해 간암수술을 받고 독한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도 할머니의 첫마디는 “니 아버지 밥은?”이었다. 늘 그랬다. 할아버지를 찾지 않는 할머니, 처음 보는 모습이다.

같은 시각, 할아버지가 도착한 진주 경상대병원의 의료진은 “수술해도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다시 할아버지를 태우고 하동삼성병원으로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

동행

노부부는 서로를 지켜왔다. 중년에 하반신이 굳어 10여년간 앉아 지낸 할머니를 일으켜 세운 건 할아버지였다. 유족들은 “(아버님이) 그때 얼마나 돈을 썼는지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할아버지의 정성에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다닐 수 있게 됐다.

할아버지는 1999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심장혈관 3개 중 하나가 막혔다. 수술 뒤 의사는 3∼5년 정도 버틸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할머니는 이런 할아버지를 10년 넘게 지켜냈다. 당신도 당뇨로 신장이 좋지 않고 지난해 두 차례 간암수술까지 받았지만 언제나 할아버지 약부터 챙겼다.

부부는 조금만 아파도 함께 집 앞 병원을 찾았다. 양지병원 김아성 원장은 “할아버지 아플 때는 할머니가 병원 가자 채근하고, 할머니 아플 때는 할아버지가 잡아끄는 통에 항상 두 분이 함께 약을 타러 오셨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음식을 꼭 정해진 가게에서 샀다. 젓갈 살 때는 풀마트 앞 반찬가게, 토란 살 때는 고향미용실 앞 식품점에 가는 식이다. 할아버지는 거기서 사온 젓갈과 토란을 제일 좋아했다. 요양사 오씨는 “할머니가 토란국과 매운탕 끓이는 법, 된장 고추장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고 했다. 할아버지 입맛에 맞춘 조리법임은 나중에 알았다.

1월 14일 0시, 그리고 새벽 5시

하동삼성병원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병실이 없어 응급실 침대에 누웠다. 일곱 자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할아버지는 14일 0시를 조금 넘겨 숨을 거뒀다. 패혈증으로 의식이 없던 할머니는 할아버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안치실로 옮기자 할머니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의료진은 할머니를 중환자실로 옮기기 위해 일단 응급실로 모셔와 침대에 눕혔다. 할아버지가 숨을 거둔 그 침대다. 새벽 5시,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빈소 하나에 두 영정이 나란히 걸렸다.



할아버지는 죽음 이후도 준비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노트를 정리하다 ‘세상을 떠나면 모아 둔 돈을 장학금으로 쓰라’는 글을 발견했다. 장남 명(65)씨와 차남 호씨는 18일 하동군청을 찾아가 장학금 300만원을 기탁하고, 10㎏ 쌀 20포대를 마을 경로당에 기부했다.

냉장고엔 젓갈이 빼곡했다. 22일 하동 집에는 호씨가 짐 정리를 위해 내려 와 있었다. 토란, 감, 우유 등이 가지런히 정리된 냉장고를 열어보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것들뿐이네”라고 한다.

-두 분이 같은 날, 같은 침대에서 돌아가셨는데.

“당시 어머니는 장기가 다 망가져 있었어요. 아버지 가실 때까지 버티다 가셨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원래 ‘한날한시에 죽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으니까.”

하동=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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