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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의 미디어비평] 막장드라마 소탐대실

‘막장드라마’, TV드라마의 새 장르로 자리잡나
‘막장’ 트렌드가 지배하는 드라마시장

막장이란 ‘탄광 갱도의 막다른 곳’을 의미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희망이 없는, 그야말로 절망적 상황을 묘사하는 용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막장인생’은 인간으로 생각조차 어려운 극한 인생살이를 뜻한다. 이 말은 광산업 종사자들을 폄훼하는 없어져야할 극단적인 단어다.

그런데 방송가에서 요즘 ‘막장’이란 용어가 난무한다. ‘막장드라마’ 때문이다. 작가나 PD들 조차 가장 싫어하면서도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단어다. 시청률 지상주의는 ‘막장’에 대한 유혹을 더욱 불러일으킨다. 오죽하면 KBS2의 ‘개그콘서트’에서 막장드라마 연출을 묘사한 코너 ‘시청률의 제왕’이 최고의 인기를 누렸을까.

TV드라마 구성에서 ‘막장 프레임’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또 막장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아직 분명하지 않다. 다만 ‘막장 프레임’에만 들면 시청률은 급상승한다. 시청자들 역시 욕하면서 드라마를 본다. 그만큼 막장의 파괴력은 크다. 그러니 시청률에 볼모가 되다시피한 PD와 방송작가들에게 여간해서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막장 수준이 갈수록 올라가니 웬만한 자극으로 먹히지 않는 현실이다. 어느 정도 강도를 높여야 반응하는 이른바 ‘막장 역치’의 수준은 더욱 높아가고 있다. ‘좀 더 자극적으로, 좀 더 강하게, 좀 더 독하게’란 제작진의 잠재의식이 드라마를 지배하고 있다.

막장작가에 이어 막장PD, 막장 전문배우까지 등장

막장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이제 막장드라마라고 드러내놓는 PD나 작가들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됐다. ‘막장 작가’와 ‘막장 PD’에 이어 급기야 ‘막장 전문배우’까지 출현하고 있다.

‘막장’이 TV드라마의 새 장르가 되다시피 한다. 스릴러와 추리, 멜로, 판타지,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물에 ‘막장’이란 새로운 장르가 생겨난 것일까. 드라마 상황설정도 엇비슷하다. 출생비밀과 결손가정, 비상식의 가족관계, 혹독한 시집살이, 불륜과 배신, 사랑과 복수, 권력과 음모, 질투와 시기, 재벌남과 된장녀, 신데렐라 콤플렉스 등이 기본 설정으로 자리잡는다. 요즘 드라마들은 이것도 모자라 극한 상황만을 절묘하게 엮은 조합형 ‘막장드라마’로 빠르게 진화해가고 있다.

막장 드라마는 시청률에서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시청률은 지난 8일 15.4%(이하 닐슨코리아 기준)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 드라마 역시 출생의 비밀에다 엇갈린 운명, 검사의 짝사랑, 암투와 음모, 질투와 배신, 출세주의 등이 키워드나 다름없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출생한 아기는 단숨에 소녀로 급성장하는 ‘5년 뛰어넘기’ 빠른 템포의 시간설정으로 안방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천방지축 장보리(오연서 분)를 둘러싼 이 드라마는 비현실성과 복잡한 인간관계의 설정에 스토리 전개 기반을 두고 있다.

막장의 진화인가, 출생비밀에서 대리모, 배신, 복수, 질투…

다른 드라마들도 마찬가지다. 원치 않는 임신과 대리모, 출세주의, 사랑과 복수 등 웬만한 막장 요건들을 쉴새없이 등장시킨다. MBC 주말드라마 ‘호텔킹’ 역시 반전과 반전을 거듭하며 시청률이 크게 출렁거린다. ‘장보리’나 ‘호텔킹’이 사랑을 다룬 로맨틱 코미디물이 될 것이란 당초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KBS2의 수목드라마 ‘골든크로스’ 역시 음모에 휘말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은행원 아버지와 여동생의 복수를 위한 검사가 된 남자의 이야기다.

막장드라마의 전설은 단연 2013년 MBC의 ‘오로라공주’. 150부작 일일드라마 ‘오로라’만큼 장안에 숱한 화제를 뿌린 작품도 흔치 않다. 방송작가를 원하는 지망생들에게 ‘성공의 교범’으로 통한다. ‘암세포는 소중한 나의 인생의 동반자’란 독백은 지금까지 명대사로 남아있다. 여기에 주연급 배우들의 잇따른 사망을 다루다보니 ‘살생부’ 이야기가 나돌았고, 심지어 유체이탈에 레이저광선까지 등장시켜 많은 논란을 빚었다.

막장드라마는 비단 어제 오늘만은 아니다. 2002년 MBC의 ‘인어아가씨’, 2004년 MBC의 ‘왕꽃선녀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어’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아버지, 그 아버지를 향한 복수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자라난 전처 딸의 복수를 그린 드라마’였다. ‘왕꽃’ 역시 평범한 가정에 입양돼 살고 있던 무속인의 딸 ‘초원’이 무병에 걸려 고난을 겪지만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된다는 스토리다. 역시 막장의 범주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2월 종영한 KBS2의 주말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은 시청률이 무려 47.3%까지 치솟았다. ‘인어아가씨’부터 ‘왕가네 식구들’까지 인기드라마 시청률은 막장시비에 휘말릴수록 30~50%대를 오르내렸다.

막장드라마, 시청률 대박나도 1회성 광풍일 뿐

최근 KBS2 일일드라마 ‘뻐꾸기둥지’가 방송가의 관심사 중 하나다. ‘막장의 대가’란 별명을 가진 톱 탤런트 장서희(백연희 분)의 복귀 자체만으로 화제를 뿌린다. 7회에서 이미 시청률 12.7%를 넘어섰다. 장서희는 2008년 ‘아내의 유혹’에서 막장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현모양처였던 여자가 남편에게 버림받고 가장 무서운 요부가 되어 예전의 남편을 다시 유혹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는 복수극을 그린 드라마였다. 여기서 스타덤에 오른 장서희 캐릭터가 ‘뻐꾸기둥지’에서 100% 살아난다면 또한번 시청률 광풍이 불 수도 있다. 장서희의 전문배우의 연기력에 거는 기대감이 그래서 더 높다.

이같이 지상파 방송3사는 요즘 ‘막장’으로 경쟁을 벌인다. 일각에선 월·화드라마, 수·목드라마, 그리고 주말드라마에서 볼 만한 게 없다고 푸념한다. KBS 주말 대하사극 ‘정도전’을 제외하고 모두 인간사를 다룬 비슷한 장르물이다. 해묵은 스토리, 얽히고설킨 복잡한 인물관계, 상식을 초월한 비현실적 설정들은 여느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1주일에 평균 20여편이 쏟아져 나오는데 볼만한 드라마가 없다니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닐 수가 없다.

막장은 소탐대실, 드라마한류 기반을 갉아먹는다

TV드라마는 한류의 모태였다. 2002~2003년 MBC의 ‘대장금’과 KBS2의 ‘겨울연가’는 당시 연기력과 작품성, 연출력에서 최고수준이란 평을 받았다. 1990년대 KBS의 ‘용의 눈물’이 2000년 ‘태조 왕건’, 2007년 MBC의 ‘주몽’의 원동력이 되었다. 시청률 42.2%를 기록한 2012년 MBC의 ‘해를 품은 달’ 역시 이러한 국내 PD와 작가들의 피나는 노력이 누적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올 초 대박이 난 SBS ‘별에서 온 그대’를 막장드라마라 일컫지 않는다. 스토리나 대본만 본다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별그대’는 로맨틱 판타지의 전범(典範)으로 남아있다. 이같이 PD와 작가가 드라마에 혼을 불어넣는다.

드라마의 성패는 작가와 PD가 얼마나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하느냐에 달려있다. 비현실적인 제작비에다 시청률 만능에 내몰린 작가나 PD들이 지금 막장드라마에 과도한 창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막장드라마는 창의적 상상력 빈곤의 결과물

나아가 갈수록 쏟아지는 ‘막장드라마’가 자칫 한류를 주도해온 드라마 제작기반을 갉아먹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이렇게 쉽게 드라마를 만들다간 머지 않아 드라마한류를 꺼트리는 자충수가 될 것이란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국드라마에 열광했던 중국 등 외국 시청자들은 이미 한국의 ‘뻔한 스토리’ ‘뻔한 설정’ 포맷의 기법을 알아차리고 있다. 첫방부터 그들은 드라마 줄거리를 훤히 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막장을 원하지 않는다. 작품성과 창의력, 연출력을 기대한다. 한국드라마 포맷을 사가지고 가 부지런히 자기들 문화를 심는다. 2~3년내 한류를 중류(中流) 내지 한류(漢流)로 넘어서겠다며 매섭게 우리를 추격해오고 있다.

막장드라마는 사회에도 깊은 후유증을 남긴다. 가족의 관계 및 가치에 대한 왜곡과 혼돈을 야기하는 등 사회적 가치를 심각하게 교란한다. 물질만능주의에서 가정해체까지 부지불식간에 그릇된 가치관을 우리 머릿속에 심어놓는다. 벌써 주변에서 ‘가치전도’(價値顚倒)의 현상을 목격한다.

TV드라마는 세상을 반영하는 ‘사회적 거울’이다. 한국 드라마PD와 작가들이 지금같이 ‘막장의 포맷’에 함몰된다면 드라마한류의 미래는 없다. 더 이상 소탐대실이 없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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