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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의 방송문화비평] TV드라마PD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라

[김경호의 방송문화비평] TV드라마PD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라 기사의 사진
막장코드가 일상화된 TV드라마시장

요즘 TV를 보면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문득 떠오른다. 좀 생뚱맞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를 보고 난 후 낯익은 일상에 대한 일종의 ‘낯설기 하기’가 습관이 된 탓일까.

그만큼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원작 소설과 영화 모두 깊은 여운을 남겼다. 파스칼 메르시어(Pascal Mercier)가 쓴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 Night Train to Lisbon, 이하 리스본열차)는 지난 2004년 전세계 30개국에서 출간된 후 수백만부가 팔린 유럽 현대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파스칼 메르시어스는 자신의 삶을 판타지처럼 소설에 투영시켰다. 매일 익숙하지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주인공이 과감히 떠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스위스 베른 출신인 저자도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이 고전문헌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저자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 장면은 스위스 베른의 비 내리는 다리 난간. 자살하려던 붉은 코트 차림 여성을 구한 소설 속 주인공은 이내 묘한 일탈의 단초를 발견한다. 그녀가 남긴 붉은 코트 속에서 낡은 책 한권과 15분 후 출발하는 리스본행 티켓 한 장을 발견한다. 이 순간 지루함에 살아온 주인공은 난생 처음 묘한 이끌림으로 책을 쓴 아마데우 프라두를 만나기 위해 강의조차 팽개친 채 일상을 탈출해 무작정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뜻밖의 리스본 여행은 일상을 깨버렸다. 현실적으로 엄청난 모험이나 다름없다. 리스본 여행은 1974년 포르투갈 민중혁명의 역사현장으로 그를 안내한다. 책 한권과 티켓 한 장은 억압과 혁명, 사랑과 배신이 뒤얽힌 포르투갈 과거로의 여행을 안내하는 비상구였다.

‘낯설기 하기’가 창의력과 상상력의 시발점

그런데 명장 빌 어거스트(Bille August) 감독이 <리스본열차>의 메가폰을 잡았다. 그의 영화는 지난 6월 국내에 개봉됐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두차례 수상한 빌 어거스트 감독 역시 일상의 낯익음에서 떠나려 한 것인가. 그의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은 우리에게 일상적 삶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영화 <리스본열차>는 1993년 역시 빌 어거스트감독의 <영혼의 집>에서 드러낸 사회역사 의식과 맞닿아있다. 무대가 된 칠레 반정(反政) 당시 이념충돌의 현장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들은 무정부속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리얼하게 그려냈다.

여느 영화와 다를바 없는 스토리가 전혀 진부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평범한 소재와 낯익은 소재를 전혀 평범하지 않은, 새로운 스토리로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평범한 식재료를 갖고 비상한 맛을 내놓는 식객의 주인공과 같다고나 할까.

<리스본열차>는 일탈(逸脫)이 갖는 의미를 보았다. 기능주의 사회학에서 일탈은 비정상의 의미가 강했다. 산업사회에서 자살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연구했던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Emille Durkheim)은 ‘일탈’을 균형을 깨는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보았다.

일탈이 이제 병리만은 아니다. 일탈은 거대한 틀에 박혀 쳇바퀴 도는 듯한 삶에 대한 되돌아봄의 성찰과 사색에서 출발한다. 어항 속 물고기마냥 살아가는 일상적 삶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일종의 ‘낯설음’, 그것이 창의력과 상상력의 출발점이다. 그 상상력과 창의력은 시청자들의 내면의 일탈 욕구를 폭발시킨다. 비록 비현실적인 세계라 해도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그런 점에서 <리스본열차>는 의식 탈출의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일탈적 사고’는 PD에게 필요조건

<리스본열차>는 단순한 일상의 탈출이나 벗어남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나 익숙한 현실을 내 스스로 낯설게 하고,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징검다리를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우리를 사색에 빠지게 만든다.

원작과 영화 모두 우리에게 일상에서 벗어난 낯선 곳에서 ‘나를 규정하는 현실관계’들을 객관화해 되돌아보기를 권유한다. 주인공인 라틴어 고전문헌학 교수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 분)는 곧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그리고 나의 현실 속 모습이다.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드러나는 자유, 그리고 이 자유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발견한다.

<리스본열차> 주인공은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제3의 눈으로 다가가게 만든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우리에게 ‘나의 현실적 삶’은 전혀 다른 새로움이다. 새로움으로 사회적 관계의 의미를 비로서 깨닫게 된다.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와 jTBC <밀회>가 그런 사색과 성찰에서 나온 새로움이다. 전자는 판타지로 현실 탈출의 비상구를 열었다면, <밀회>는 40~50대 위선의 탈을 과감히 벗겨버렸다. 너무나 진부한 소재인데도 새로움의 장르를 만들었다.

SBS <별그대>와 jTBC <밀회>, '낯설기‘와 일탈의 산물

최근 TV드라마들이 너무 막장에 익숙해버렸다. 드라마 대부분 ‘막장 코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갈수록 막장에 젖어버린다. 매주 지상파와 종편, 드라마채널에서 20여편이 방송되고 있지만 시청률 미달로 일부는 서둘러 문을 닫기도 한다. 상상력과 창의성의 빈곤의 귀결이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떨어지면 결국 기댈 데라고는 낯익은 막장코드다. 지금 막장코드가 유일한 흥행의 비상구라는 PD들의 자조가 적지 않다. 최근 몇 개월 사이 잘나간 드라마중 막장 아닌 것이 있던가.

초반부터 막장코드로 점철된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가 역시 30%대를 웃도는 높은 시청률로 독주하고 있다. 스릴러에다 로맨스, 코미디까지 골고루 막장의 양념을 더한 결과다. 9월 14일 <장보리>의 시청률은 수도권 기준 33.5%(전국 기준 31.8%, 닐슨사 집계)에 달했다.

어느 샌가 드라마시장에 ‘막장’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젠 ‘욕하더라도 제발 봐달라’고 읍소하는 요즘 방송드라마 시장의 현실이다.

마약보다도 더 강한 막장드라마 중독성

‘중독성 강한’ 막장드라마 외에 딱히 방책도 없다고 하소연한다. ‘드라마 시청률만 올려주면 작가나 PD 업고 다니겠다’고까지 한다. 그러니 막장 작가의 몸값이 치솟는다. 신예작가 등용문이 사라진지 오래니 이들은 더 금값이 되어간다. 출생의 비밀, 재벌남과 된장녀, 불륜관계, 권선징악, 고부갈등 등 비현실적인 스토리가 방송사를 돌고 돈다. ‘황당하지만 자극적인’ 상황을 막판에 끼워넣으면 그야말로 ‘끝’이다.

막장드라마 줄거리가 뻔해서 결말까지도 아는데도 이상하게도 시청자들은 다음회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만큼 중독성은 무섭다는 이야기다. 몸에 해로운 줄 알면서도 이내 담배를 집어드는 환자와 같이 막장의 마약성분은 독하다.

드라마는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The Mirror of Reflecting The World)이다. 세상을 반영하지만 결코 왜곡해서는 안된다. 왠지 막장드라마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사회를 보는 시청자들의 시각들은 더욱 비뚤어지고 왜곡되어 간다는 지적들이 많다.

시청자들은 지금 MBC의 ‘대장금’과 KBS2의 ‘겨울연가’는 물론 MBC의 ‘해를 품은 달’ 같은 그런 작품을 보고 싶다. 올 초 대박이 난 SBS <별에서 온 그대>를 보자. 매회 황당하기 이를 때 없는 상황설정이지만 <별그대>를 누구도 막장드라마라 이야기하지 않는다. 스토리나 대본만 본다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이와 같이 PD와 작가는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드라마에 혼을 불어넣는 주체들이다.

지금이 막장코드 벗어나 명품드라마 만들 때

드라마 PD들이 지금이 <리스본열차>를 타야할 때가 아닐까 싶다. 빈곤한 상상력, 무력한 창의력, 쳇바퀴 도는 세트장 속 막장스토리는 시청자들이 볼만큼 충분히 보았다. 방송채널 선택권이 상대적으로 적은 시청자들에게 시청률 핑계로 막장드라마 시청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범하고 지루한 막장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더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를 시청자들은 원한다.

창의성과 상상력이 넘칠 때 불후의 명작들이 나온다. MBC KBS 등 막강화력을 갖춘 지상파 드라마 예능프로그램들이 갈수록 후발 jTBC와 tvN에 밀린다. 이러한 희한한 역전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jTBC와 tvN이 만드는 프로그램을 나도 만들고 싶다’. 일상화된 낯익은 막장코드를 탈출하고픈 지상파 PD들의 갈구가 요즘 유난히 귓전을 맴돈다.

김경호 방송문화비평가 kyungho@kmib.co.kr blog.daum.net/alps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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