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ICT인력 4만명 육성”… IT노동자들, ‘국좀’ 양산은 안 된다

[갑을병정 그 아래, 한국 IT노동자의 한숨]포괄임금제·보도방 등 개선 한목소리

IT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갑도 을도 아닌 병과 정 아래”라고 말한다. 최첨단 4차 산업혁명의 주역이라는 수식어는 화려한 외관일 뿐이다. 혹독한 야근과 비정상적인 대우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국민일보는 ‘갑을병정 그 아래, 한국 IT노동자의 한숨’ 시리즈를 통해 IT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도 용기를 냈다.

게티이미지 뱅크

갑은 “암묵적으로 방조했다”며 사과했다.
을은 “그나마 대기업이니 대체 휴무라도 준다”고 했다.
병은 “국회에서 자해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래야 나라도, 국회도, 언론도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질 것이라 생각했다”며 막막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프리랜서인 정은 고용 권한을 갖고 있는 권력자의 부적절한 행동을 피하려다 사망했다.

앞서 3회에 걸쳐 소개한 IT노동자들의 이야기는 특별히 불행한 사람에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나에게’ 또는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리고 모두가 외면한 기형적인 노동 환경 시스템이 비극을 만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2013년 고용노동부 의뢰로 조사해 내놓은 보고서 ‘IT산업 근로시간 실태 및 개선방안’은 IT업계의 문제점을 이렇게 분석했다. 장시간 노동이 구조화된 조직문화, 중층적인 하도급 구조, 그리고 노동시간 관리 부재.

피해자들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에서 “과학기술·ICT(정보통신기술) 인재 4만명을 양성하겠다”고 밝힌 것을 두고 이들은 경고를 잊지 않았다. 지금의 임금 제도와 고용 시스템을 바꾸지 않은 채 인력만 키운다면 IT업계의 부작용들은 더 큰 규모의 사회문제로 비화될 것이라고 말이었다.

◇포괄이라는 이름의 임금제
노동사회연구소에서 지적한 노동시간 관리 부재는 포괄임금이라는 제도에서 비롯했다. IT 노동자들도 이런 지적에 동의했다. 원청과 하청업체들이 포괄임금제를 악용해 과도한 야근을 강요하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포괄임금제란 노동시간을 측정하기 어려운 업종에서 연장·야간근로수당을 따로 계산하지 않고 실제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정해진 금액을 임금으로 지급하는 제도다. 업무 중 휴식시간이 긴 경비원이나 시설관리인, 수행 운전기사 등이 포괄임금제 적용 대상이다. 노동현장에서는 1974년 포괄임금 계약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관행이 됐다.

대법원 판결만 놓고 보면 IT업계 등 사무직에서는 포괄임금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노동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일반 사무직의 경우 포괄임금제 계약을 이유로 야근수당을 주지 않는 것은 불법이다.

하지만 2016년 고용노동부가 실시한 근로시간운용실태조사를 보면 실상은 달랐다. 조사대상 사업장 중 30.1%가 포괄임금제를 적용하고 있었다. 또 포괄임금제 활용 사업장 중 78.5%는 사무직도 포괄임금제를 따르고 있었다.

특히 IT업계는 포괄임금제를 당연한 기업 문화로 받아들였다. 더 큰 문제는 포괄임금에 대한 왜곡된 접근이었다.

동생의 ‘과로자살’ 산업재해 신청을 준비 중인 장향미씨는 “IT 업계에서 포괄임금제는 아예 야근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야근을 얼마나 오래 하든 상관 없이 정해진 임금 안에 이미 야근 수당이 포함돼 있다. 무리한 연장근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장씨의 동생 민순씨는 2017년 인터넷강의 업체인 ‘에스티유니타스’에서 웹디자이너로 근무하다 과도한 업무와 직장 내 괴롭힘으로 목숨을 끊었다.

<자료 : 한국노동사회연구소 ‘IT산업 근로시간 실태 및 개선방안’(2013년)>

노동사회연구소 조사에서도 다른 업계에 비해 IT업계는 장시간 근로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IT 업계에 종사하는 사무직 근로자의 하루 평균 근로시간을 보면 초과근로시간은 2.7시간으로 주 단위 초과근로시간으로 환산하면 11.6시간 정도였다.

이는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다를 바 없었다. IT 업계에서 대기업 중 가장 먼저 노동조합을 만든 SK C&C도 최근에야 포괄임금제를 없애기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SK C&C 노조 관계자는 “야근을 하면 야근한 시간의 1.5배 비율로 대체휴가를 주는 게 당연한 건데 1대 1 대체휴무를 주는 것만으로도 직원들은 고마워한다”며 “그간 야근 수당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대기업이니 이 정도였다. 하청이나 재하청, 프리랜서 노동자의 경우 야근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물론 수당과 대체휴가는 먼나라 얘기다. 폐 자른 개발자로 유명한 양도수씨는 월 400시간 근무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다면 포괄임금제의 문제점은 왜 유독 IT업계에서 더 부각되는 걸까. 민주노동 산하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 관계자는 “IT산업 자체가 생긴 지 얼마 안되다보니 사용자도, 노동자도 제조업이나 건설업 같은 기존 산업과 달리 제대로 된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다”면서 “노동자들조차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그게 부당한 일이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포괄임금제의 폐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높지만 제도 개선의 속도는 나지 않고 있다. 고용부는 포괄임금제의 오남용을 막겠다며 지난해 6월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겠다고 했지만 돌연 연말로 시기를 미뤘고 해를 넘겨서도 가이드라인은 나오지 않았다.

SK C&C 노조는 최근 포괄임금제를 없애기 위해 성남지청에 근로감독 요청을 했다. 노조 관계자는 “노동청으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회사가 스스로 포괄임금제 포기를 선언할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익명을 요청한 중소 SI업체 관계자는 “최저임금만큼 포괄임금제도 예민한 문제”라며 “야근 수당 등을 감당할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는 대다수의 관계자들이 공감했다. SK C&C 노조관계자는 “당장은 힘들겠지만 노동자들 삶의 질이 높아지면 업무의 질도 높아진다는 점에서 투자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도수씨도 “야근의 폐해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롯데하이마트 하청 업무를 하면서 직원들에게 ‘야근을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며 “결과적으로 소프트웨어 수준은 높아졌고 직원들의 업무 효율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프리 반프리… 이중계약서
IT 업계의 불법적 관행도 열악한 근무 환경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 ‘보도방’이나 ‘프리’ 또는 ‘반(半)프리’가 대표적이다. 노동사회연구소에서 꼽은 중층적 하도급 구조가 만들어낸 IT업계의 부끄러운 풍경이다.

공공기관이나 금융기업, 대기업 등 원청업체들이 시스템통합(SI) 작업을 시작한다고 해보자. 먼저 SK C&C 같은 대형 SI업체에 프로젝트를 발주한다. 1차 하청이다. 이어 이 업체는 중소 SI업체와 계약을 맺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2차 하청이다. 이때 인력이 부족하면 인력소개소 역할을 하는 ‘보도방’을 통해 프리랜서를 고용한다. 프리랜서 입장에서는 3차 하청이다. 원청업체는 보도방 업체 소속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노동자 처우에 대한 책임을 피한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프리랜서 노동자는 위계의 제일 밑바닥을 차지하는 ‘정’의 신분이다. 처우는 열악하고 고용도 불안하다. 실족사한 프리랜서 웹디자이너 장원향씨 역시 그런 처지였다. 호텔 비상계단에서 추락사한 장씨의 죽음은 의혹투성이다. 유족들은 고용 권한을 가진 보도방 회사 임원의 부적절한 행동을 피하려다 장씨가 호텔 비상계단에서 추락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억울한 죽음이지만 유족들은 산재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보도방이 고용 권한을 갖고 있음에도 책임을 피하기 위해 장씨의 소속을 근로자 1명인 사업장으로 했기 때문이다. 위로금이나 유족급여, 장례비 지원 역시 받지 못했다.

산업은행 화장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중소 시스템개발(SI) 하청 업체 직원인 차모씨는 반프리였다. 차씨는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에 4대 보험, 퇴직금 등이 명시된 근로계약서(왼쪽)와 프로젝트 이름과 기간 등 적힌 위임(용역)계약서 등 2개의 계약서를 썼다.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 제공

산업은행 화장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중소 SI 하청업체 직원인 차모씨는 반프리였다. 반프리란 정규직 근로 계약과는 별도로 프리랜서 용역 계약을 맺는 걸 가리킨다. 정규직인지 프리랜서인지 애매하다 보니 업계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일종의 편법이다.
기획재정부는 고용의 안정성을 위해 공공기관의 사업에 정규직을 투입하도록 했다.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라는 뜻이다. 준 공공기관인 산업은행도 기재부 예규에 따라 SK C&C에 차세대 프로젝트를 발주하면서 정규직 직원만 일하도록 요구했다. SK C&C는 차씨에게 일을 시키면서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는 대신 두 개의 계약서를 썼다.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에 4대 보험, 퇴직금 등이 명시된 근로계약서, 그리고 프로젝트 이름과 기간 등이 적힌 위임(용역)계약서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업계 노동자는 “프로젝트를 할 때만 정규직일 뿐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게 반프리 노동자”라고 말했다.

◇우리는 ‘국좀’입니다
물론 IT 노동자들이 회사 탓, 나라 탓, 제도 탓만 하는 건 아니다. 부족한 실력의 고만고만한 인력들이 넘쳐나면서 시장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존중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었다며 반성하기도 한다. 원청업체가 야근을 강요당할 때도 군소리 없이 받아들이고 과로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업계 풍토를 바꾸지 못하는 데는 인력 수급의 불균형이 자리잡고 있다. 노동사회연구소가 말하는 장시간 노동이 구조화된 조직 문화가 만연한 이유이기도 했다.

IT업계의 한 노동자는 “야근을 왜 하냐고 원청에 항의하면 ‘네가 실력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냐’는 식”이라며 “그러면 내가 정말 실력이 없어서 야근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IT 벤처붐이 일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각 회사는 시스템이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 대규모 비용을 투입했고 투자비의 대부분은 개발자들의 인건비로 쓰였다. 인력이 많으니 야근은 없었고 야근이 있더라도 충분한 대가가 수당과 인센티브의 형식으로 지급됐다.

관련 인력들이 대거 배출된 뒤 상황은 반전됐다. 책임의 일부는 정부에도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는 IT와 ICT 산업을 키우겠다며 어설픈 기술자들을 키워내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 때부터 업계에는 실력없는 개발자들을 지칭하는 ‘국좀’이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국비지원 교육 프로그램의 ‘국’과 좀비의 ‘좀’을 붙인 합성어다. 수준 낮은 개발자를 낮춰 부르는 말이다.

원청업체들은 이들이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표출하면 “너희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는 말로 일축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IT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하지 않았다. 실력있는 IT 노동자들은 해외로 떠났다. 숙련도가 낮은 인력이 남았고 대우는 더 나빠졌다. 악순환이었다. IT노동자들은 그 악순환의 긴 터널에 갇힌 채 오늘도 과로와 부당한 대우 속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글 싣는 순서>
1회/폐 잘라낸 IT개발업자 “52시간 근무해도 IT기업 안 망해요”
2회/하청에 재하청 ‘IT 정글’서 의문사한 딸…“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3회/“과로사와 과로 자살은 뭐가 다른가요”
4회/몰랐고 모른 척 했다
5회/미국의 실리콘밸리엔 야근이 없다
6회/기준이 필요하다, 표준계약서·야근 수당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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