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노동계, ‘기준’이 필요하다… 제안요청서·표준계약서 등 개선

[갑을병정 그 아래, 한국 IT노동자의 한숨]야근은 무료·계획없던 업무 지시도 따라야

게티이미지뱅크

IT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갑도 을도 아닌 병과 정 아래”라고 말한다. 최첨단 4차 산업혁명의 주역이라는 수식어는 화려한 외관일 뿐이다. 혹독한 야근과 비정상적인 대우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국민일보는 ‘갑을병정 그 아래, 한국 IT노동자의 한숨’ 시리즈를 통해 IT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도 용기를 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린 IT노동자들이 한결같이 얘기한 것은 ‘기준’이었다. 기준이 없으니 혹독한 업무량과 야근에 시달려야 했고 제대로 된 처우와 대우는 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회사대로,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대로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됐다.

야근은 공짜가 아니다
IT 업계에선 ‘야근=무료’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야근 수당은 꿈도 못 꾸다 보니 생겨난 것이다. 물론 ‘근로기준법’에는 야근 수당에 대한 규정이 있다. 하지만 노동자가 야근했음을 입증해야 연장 근로수당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사실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양도수씨는 농협정보통신에서 근무하면서 과도한 야근으로 질병을 얻었고 결국 폐를 잘라냈다. 그러나 산업재해 신청을 위해 스스로 야근한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회사는 출퇴근 기록이 없다고 했고 양씨는 카드 사용과 톨게이트 이용 내역 등으로 자료를 수집해야 했다. 그러나 회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회사가 양씨의 근무 일지를 멋대로 작성한 데서 한발 더 나가 양씨에게는 이 문서를 보여주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대리 서명을 받았다는 거다. 양씨는 야근 일지를 위조한 회사를 상대로 사문서 위조, 사기 등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그나마 양씨는 정규직 직원이라 나은 편이다. 용역 계약을 맺은 프리랜서의 경우 야근비 자체를 청구할 수 없다.

노동 전문가들은 이를 해결하려면 근무 시간을 회사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노총 법률원 장재원 변호사는 “사용자로 하여금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정확히 기록·보존하도록 강제하는 내용의 법률적·정책적 규율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양씨의 사례처럼 회사가 야근 시간을 허위로 작성하거나 조작하지 않도록 예방 장치도 만들어야 한다.
일단 관행이 된 포괄임금제를 없애야 한다.
포괄인금이란 노동시간을 측정하기 어려운 업종에서 연장·야간근로수당을 따로 계산하지 않고 실제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정해진 금액을 임금으로 지급하는 제도다. 업무 중 휴식시간이 긴 경비원이나 시설관리인, 수행 운전기사 등이 포괄임금제 적용 대상이지만 IT 노동계에도 이를 적용해 왔다.

표준 계약서도 만들어야 한다. 산업은행 화장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중소 SI 하청업체 직원인 차모씨는 반프리였다. 반프리란 정규직 근로 계약과는 별도로 프리랜서 용역 계약을 맺는 걸 가리킨다.

해법은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게임업체 징가의 시스템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하리 자얄만(36)씨는 정직원의 경우 야근이 존재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나면 휴가와 야근비로 확실한 보상을 한다고 말했다.
특히 프리랜서 개념인 ‘파트타임’ 직원은 회사가 좀 더 철저히 관리한다고도 했다.
자얄만은 “출근과 퇴근 시간을 체크하는 기기를 구비해 인사담당자는 이들의 출퇴근 시간을 기록해 임금을 지급한다”면서 “회사가 출퇴근 기록 기기를 비치하지 않았다가 당국에 적발되면 회사는 거액의 과징금을 내야 하고 직원이 출퇴근 기록을 요구하면 회사는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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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는 아예 2017년 ‘프리랜서 보호법(Freelancer Isn't Free Act)’을 발효했다. 계약서는 문서로 만들어 회사와 노동자가 한 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계약서엔 수행할 업무, 일에 대한 보수와 지급 날짜를 세분화해 적도록 했다.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회사가 처벌하거나 협박하는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한다고도 했다.

‘갑툭튀’를 막아주세요
“사장님이 이건 꼭 반영하라고 합니다.”
최근 웹디자인을 하는 IT노동자 A씨는 원청업체의 갑작스러운 업무 전달에 멘탈붕괴를 경험했다. 이미 사업 설계에 따라 작업을 진행해 왔는데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게 되면 설계 자체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서비스 오픈 일주일을 남겨두고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라고 합니다. 무리라고 항변해도 무조건 하래요. 이렇게 되면 저희는 야근할 수밖에 없어요.”
시스템 통합 작업을 하는 SI업체 B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 같은 사례는 IT업계에 공공연하다. 원청업체가 IT노동자와 하청업체에 당당히 초과 업무를 요구할 수 있는 건 제안요청서(RFP) 때문이다. RFP란 원청인 발주자가 특정 과제의 수행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하청업체에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하청업체 직원들이 상세한 설계를 하게 된다.
그러나 IT노동자들과 하청업체 관계자들은 원청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 추상적 내용을 RFP에 담은 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원청이나 발주 기업이 초기 계획안과 다른 업무를 예고도 없이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야근은 늘어났고 사업 진행에 필요한 비용이 추가됐다.
B씨는 “RFP는 말 그대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전 제안서에 불과하다”면서 “협의 과정을 통해 최종 계약서에는 RFP에 있던 내용들이 빠지기도 하는데 갑자기 RFP에 있던 거 왜 안 하냐며 트집을 잡고 비용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토로했다.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이 2008년 SW 및 IT서비스 업계 종사자 7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7.7%가 현재 RFP 체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선진국 심사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선진국에서는 RFP의 요구사항이 세분화 돼 요구기능마다 필수와 선택을 체크하게 하고 제안서 상에 체크한 후 코멘트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소프트웨어 전문가는 “미국 등은 RFP만 해도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데 우리나라 원청업체의 RFP는 10장, 20장에 불과하다”면서 “원청업체는 요구사항을 명확히 하고 이를 변경할 경우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갑질’은 저희도 싫어요
원청업체나 1차 하청업체도 할 말은 있다. 재하청 업체에서 IT노동자들이 사망하는 등 문제가 발생해 도움을 주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현금 등으로 보상을 하면 배임죄로 걸릴 수 있다. 배임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해 본인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 보상을 하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만큼 배임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원청업체 관계자는 “하청업체에 ‘너희 장기가 뭐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면서 “그들이 잘할 만한 업무를 만들어 어떻게든 비용 측면에서 보상을 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제조업 현장처럼 원청의 책임 소재를 명문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가령 하청업체 직원에게 피해가 발생할 경우 원청이 책임져야 할 범위를 명확히 해 달라는 것이다.

<글 싣는 순서>
1회/“52시간 근무해도 IT기업은 망하지 않아요”
2회/“피해자는 있었지만 가해자는 없었다”
3회/“과로사와 과로 자살은 뭐가 다른가요”
4회/몰랐고 모른 척 했다
5회/미국의 실리콘밸리엔 야근이 없다?
6회/기준이 필요하다… 제안요청서·표준계약서 등 개선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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