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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깎이면 업무도 줄어야” 대법원의 임금피크제 기준

임피제 모두 무효되는 것은 아냐
사업장마다 임피제 형식 달라
노사 재협상 이어질 가능성
노동계 ‘환영’, 기업들 ‘비상’

서울 서초구 대법원. 뉴시스

대법원이 26일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임금피크제(이하 임피제)는 무효라는 판단을 내리면서 노동계와 기업 측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노동계는 부당한 임피제는 폐지돼야 한다며 적극 환영의 뜻을 내놨다. 반면 산업계는 인건비 상승 및 청년 구직자의 일자리 기회 감소가 우려된다는 입장을 냈다.

대법원이 이번 판결에서 모든 임피제가 무효라고 판단한 것은 아니다. 임금 삭감과 함께 업무량 및 업무강도 감축이 뒤따라야 한다는 등의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임피제 도입 방식이 사업장마다 달라 개별 소송에서는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다만 향후 산업현장에서 대법원 가이드라인에 따른 노사 재협상이 뒤따르거나 임피제 관련 줄소송이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임피제는 노동자가 일정 연령에 도달한 뒤 고용 보장, 정년 연장을 조건으로 임금을 감축하는 제도다.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으로 노동자 정년이 60세 이상으로 늘면서 산업현장에 본격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번 소송에서 A씨는 1991년 B연구원에 입사했고 2014년 명예퇴직했다. 연구원은 노조합의로 2009년 1월 만 55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임피제를 도입했다. A씨는 2011년부터 적용 대상이 됐다.

B연구원은 원래 정년이 61세였는데 정년은 유지한 채 임피제를 도입한 것이다.

A씨는 임피제 시행 이후 퇴직 때까지 임금 차액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번 사건 쟁점은 임피제가 임금, 복리후생 분야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 때문에 노동자를 차별하지 못하게 한 고령자고용법을 위반했는지 여부였다.

대법원은 해당 고령자고용법의 연령차별금지 조항은 강행규정이라고 판단했다. 업무 변화 등 합리적인 이유가 없이 단순히 연령만을 기준으로 노동자 임금을 삭감하는 것은 위법하다는 의미다.

대법원은 인건비 부담 완화 등 경영성과 제고 목적을 임피제를 정당화할 사유로 보기 어렵다고도 판단했다.

B연구원은 이번 소송에서 임피제로 임금이 삭감된 것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B연구원이 제출한 자료를 보면 만 51세 이상 55세 미만 정규직 직원들의 실적이 임피제 대상인 55세 이상 정규직 직원들과 비교해 오히려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55세 이상 노동자의 업무 내용이 변경되거나 목표 수준이 낮게 설정돼 업무량이 감소했다는 점을 입증할 자료도 없었다.

대법원은 “A씨에 대해 업무 감축 등 적정한 조치가 강구되지 않은 점, 성과연급제를 전후해 A씨에게 부여된 목표 수준이나 업무의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에 비춰보면 연령 차별에 합리적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①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정당성과 필요성 ②실질적 임금 삭감의 폭이나 기간 ③임금 삭감에 준하는 업무량·강도의 저감이 있었는지 ④감액 재원이 도입목적에 사용되었는지 등 조치의 적정성 등을 따져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 관계자 “임피제 효력 인정 여부 개별 사안마다 다를 것”

이번 판결로 모든 임피제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임피제가 대법원의 가이드라인을 충족했는지 여부는 개별 소송마다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임피제 유형은 정년유지형, 정년연장형 등으로 다양하고 사업장별로도 도입 형태가 다를 수 있다.

B연구원의 경우 61세 정년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임피제를 도입해 55세부터 임금이 깎이는 효과가 발생했다. 정년을 연장하면서 임피제를 도입한 다른 사업장의 경우 법원 판단이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대법원도 임피제 도입 목적의 정당성과 필요성도 기준의 하나로 제시했다.

대법원의 가이드라인을 고려할 때 향후 B연구원과 유사한 사업장의 개별 소송에서는 임피제 돌입 이후 실질적인 업무 감축 조치가 있었는지 여부 등이 쟁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현재 다른 기업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 효력 인정 여부는 개별 사안별로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국노총은 대법원 판결 이후 “지금 같은 방식의 임금피크제는 지속돼서는 안 된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한국노총은 “금융권과 공공기관의 경우 임금피크제 시행 시 노동자에게 별도 직무를 부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들의 업무 강도가 세져 불만이 커지고 수당 삭감 등으로 갈등만 커졌다”고 지적했다. 한국노총은 또 “정부는 임금피크제 도입 당시 이 제도가 청년 신규 채용을 늘릴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실제로는 청년 일자리가 늘어나는 효과는 미미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노동계 일각에서는 특정 조건들을 충족하면 임피제가 유효하다는 대법원의 가이드라인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기업들은 이번 판결의 ‘후폭풍’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고령자 고용과 관련한 산업 현장의 현실을 도외시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입장문을 내고 “임금피크제의 본질과 법의 취지 및 산업계에 미칠 영향 등을 도외시한 판결”이라며 “향후 고령자의 고용불안을 야기하고 청년 구직자의 일자리 기회 감소 등의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비판했다.

경총은 또 “임피제는 우리나라의 경직된 임금체계 실태와 고용 환경을 고려해 고령자의 갑작스러운 실직을 예방하고 청년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라며 “연령 차별이 아닌 연령 상생을 위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번 판결이 모든 기업의 임피제가 무효라는 의미는 아니라 향후 정부 가이드라인 등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반응도 나온다.

이미 임피제 시행자들에게 경감된 업무를 맡기고 있는 사업장의 경우 판결이 미칠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 정년을 연장하면서 임피제를 도입했던 기업의 경우 도입 목적의 정당성과 필요성이 법원에서 인정될 가능성도 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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