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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김미혜 교수, “글을 쓰고 번역하는 일은 삶이죠”


<아우구스트 보알의 억압 받는 자들의 연극>(1988, 열화당) 번역서를 출판한 이후 연극 관련 전문 서적 22권을 출판해온 김미혜 명예교수(한양대학교)를 만났다. 대표적인 <인형의 집>헨리크 입센의 노르웨이어 희곡을 14년에 걸쳐 10권 23편으로 완역(完譯)해 ‘연극과 인간’에서 전집으로 출판됐다. 그동안 김 교수는 출판 권 수로 32권 정도 연극 관련 전문 서적을 출판해 왔는데 희곡, 시, 소설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포함하고 학술논문과 연극평론, 공연드라마터그, 공연대본 번역을 제외해도 입센 희곡집을 포함 대략 50여권에 달했고 연극 <해변의 카프카>(2013,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연출했다. 김 교수는 광화문 1번 출구에서 만나자며 인터뷰 후에는 서울시 극단의 ‘오아시스’ 연극을 본다고 했다. 고희(古稀)의 중반을 넘겼어도 청바지 차림에 칼라 감각이 돋보이는 스카프를 두르고 나왔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오스트리아 비인 대학교에서 연극학 박사 학위를 받은 선생은 간혹 영어를 섞어 말했고 유학 시절을 말할 때는 강의하는 것처럼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헨리크 입센’ 전문가로 통하는 김미혜 교수. 14년에 걸쳐 노르웨이 원문으로 ‘헨리크 입센’ 희곡을 완역하다.


― 5막으로 된 ‘황제와 갈리리 사람’을 두 편의 희곡(세자르의 배교, 율리안 황제)으로 번역해 23편을 완역했다. 22편이 아니었군요.

“입센은 ‘황제와 갈리리 사람들’희곡에 ‘세계의 역사극’이라고 부제(副題)를 붙였어요. 2부 각 5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목이 따로 붙어 있어 2편으로 보는 게 맞지요. 입센은 단막시극 <전사의 무덤>(1850)과 3막 동화 희곡 <한여름 밤>(1853)까지 25편의 희곡을 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입센 서거 100주년(2006)을 기념해서 ‘퀼렌데일’ 출판사 입센희곡전집을 오슬로에서 구입했는데 이 마지막 희곡집에도 두 편은 빠져 있어요. 하나는 단막극이고 다른 작품은 원작자 논란도 있어서 입센이 원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희곡 2편을 빼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오리지널 원전도 찾을 수 없으니까 23편으로 보는 게 맞는 겁니다.”


―김 교수는 <모던 연극의 초석 헨릭크 입센>(2010)을 출판한 후에 <헤다 가블러>(명동예술극장), <사회의 기둥들>(LG아트센터), <왕위주장자들>(서울시극단) 작품도 대본으로 번역해 공연되었다. ‘번역으로 완주(完走) 하는 일’이 힘에 부치는 일일 텐데.

“14년 전부터 시작 됐는데 매일 번역만 할 수는 없지요. 번역이 힘든 작업이고 한 작품 책에만 매달리면 지루해질 수도 있잖아요? 대학을 정년하고부터 인텐시브하게 했어요. 전에는 <미국의 아방가르드>(2015, 연극과 인간)과 600페이지 넘는 <브로드웨이 저편>(2016)을 냈지요. 영어나 독일어로 입센 작품을 번역하면 몇 년 안에 마쳤을 텐데 노르웨이 오리지널 희곡 원문으로 번역에 매달리다 보니 어려운 것도 있었고요. 2010년에 헨릭크 입센 평전을 냈는데 2부가 작품론인데 쓸 수가 없는 거예요. 국내 입센 희곡이 번역 안 되어 있는 게 많았고 영어, 독일어 자료를 찾고 작품론을 자세하게 다루다 보니까 길어졌어요. 평전 출판 후에는 입센 희곡 전체를 국내에 소개하고 싶었죠.”


―정년(停年)을 하시면 대체로 쉬시면서 연구를 하시던데. 입센의 희곡을 완역해야 겠다는 생각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2006년도에 독일 베를린에서 27개국 세계연극학자와 아티스트들이 참석하는 ‘인터내셔널 입센 컨버런스’가 있었어요. 한국연극학회 회장을 맡고 있어서 참석했는데 자국(自國)에서 공연되는 입센작품을 발표하는 자리인데 할 말이 없는 거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입센 연구도 활발하지 않았고 ‘인형의 집’ 을 빼면 소개된 작품도 많지 않으니까요. 오슬로에 ‘입센 연구센터’가 있어요. 세계에서 공연되거나 번역된 입센의 작품들을 전시해 놨는데 중국, 일본 자료는 많은데 우리나라 자료는 한 개도 없었어요. 한글로 된 글씨를 찾을 수가 없어요. 창피하기도 하고 한국 연극학자로 수치감도 들었고, 충격이었어요. 내가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외국 나갈 때마다 입센 자료하고 책만 사서 들고 들어오면서 부터 입센을 매달리기 시작했지요.”


― 국내 번역된 입센 책도 있고 영어로 원문도 있을 텐데.

“입센 평전을 쓸 때 영어, 독일어 책들을 번역하고 봤는데 희곡 뉘앙스가 확실하게 전달이 안 되니까 노르웨이 원전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듭디다. 영어하고 독일어로 번역된 책 중에도 인명과 지명이 틀린 부분들이 많았어요. 노르웨이어를 완전히 마스터 하지는 못했지만 독일어가 많이 들어가 있어요. 내가 독일어를 할 줄 아니까. 각 나라 언어를 독학으로 공부할 수 있는 책(Teach Yourself) 노르웨이 버전을 미국서 구입해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제대로 번역하고 싶어서. 정년 후에는 작심하고 번역에 매달리게 된 거예요.”


― 선생은 입센 희곡을 완역한 후에도 번역하고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예전에는 드라마 ‘대장금’으로 한류 배우가 된 한양대학교 박사과정 제자 이영애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를 쓰고 있다고 했고, 요즘은 영화의 텍스트가 될 만한 소재로 소설을 쓰고 있다. ‘50여 권을 내셨으면 이제 쉬실 만도 한데 책 욕심이 많게 느껴집니다’. 김미혜 교수는 웃었다.

“욕심 없어요. 연극서적을 번역하고 글 쓰는 일은 좋은 교수가 되기 위해서였어요. 이 말은 정말이야. 돈 생기면 미국으로, 외국으로 나가서 작품을 본 것도 학생들 때문이었고. 한양대 석·박사 학생들이 연극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안 되겠다 싶었지. 월급 모으고, 심사 다니고 평가해서 받은 돈 모아 두었다가 해외에 다니면서 책하고 자료들을 모아왔어요. 내 인생이 번역하고 책 내면서 살아 온 거요. 남편도 대학에 있는 사람이라 이해해 줘서 고맙고.”


―고희를 넘긴 선생을 컴퓨터 앞에 14년 동안 있게 할 만큼 ‘헨리크 입센’이 매력 있던가요?

“입센 할아버지(웃음)를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했는데 인간적으로 비슷한 게 많아요. 인간이 정의롭게 살아야 하고, 사회도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이 끌려요. 특히 입센은 쁘띠부르주아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싫어했던 편이어서 글을 쓰는 동안 행복했어요. 75년 살면서 어려서는 철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나이 들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앙가주망’적인 시선들이 비슷하다고 느껴졌어요. 입센 작가 작품의 주제 의식은 희곡에 그대로 녹아있죠. 입센의 ‘사회의 기둥들’, ‘왕위 주장자들’ 같은 작품은 한국 사회 정치 현실과 여전히 비슷한 것들이 있다는 게 놀랍죠.”


― 입센은 초기에 극장도 관리 하면서 희곡을 썼다고 하더군요.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의 옛 이름)에 극장을 하나 세웠는데 입센이 극장장 겸 예술 감독을 했어요. 입센이 희곡을 쓸 때 노르웨이어로 된 희곡이 거의 없었어요. 당시 오슬로가 아니고 ‘크리스티아니아’ 였거든요. 덴마크 배우들이 와서 공연했고. 프랑스나 독일의 경박한 희극을 공연하던 시절이었는데 노르웨이적인 연극문화가 없었어요. 매년 1편씩 희곡을 쓰면서 노르웨이 민족의 글로벌 파이 한 작품을 써서 공연했어요. 초기 작품들은 그런 경향들이 나타나요. 눈을 세계로 돌리고 노르웨이를 벗어나 글만 쓰고 싶어도 돈이 없었어요. 그런데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친구 비에른 스티에르네 마르티누스 비에른손(노르웨이어: Bjørnstjerne Martinus Bjørnson)의 도움으로 27년 동안 이탈리아 로마, 독일 뭰헨과 작은도시 ‘드레스덴’에서 살면서 희곡을 썼는데 이 시기에 굉장한 희곡을 발표해요. 입센이 외국에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 입센이 노르웨이를 떠나 이탈리아, 독일 동유럽의 예술적 영감(靈感)을 많이 받았군요.

“‘예술은 어떤 크기가 있구나’를 생각한 거죠. 당시 노르웨이적인 것에만 사로잡혀서는 작가 시선이 좁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당시에 ‘뭰헨’하고 ‘드레스덴’은 노르웨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 예술을 하고 있었으까. 입센도 로마에 도착해서 건축물들을 보면서 예술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 거죠. 운문극으로 쓰여진 <브란>(1866)은 실제 목사 이야기인데 작품이 스칸디나비아에서 예술적으로 성공을 하면서 당대 최고의 작가로 부상(浮上)하게 돼요. 브란이 목사 이름이고 레제드라마 형식으로 쓰였어요. 브란 목사는 ‘전부가 아니면 무(無)’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상주의 이면서도 종교적 진리탐구자인 목사를 영웅화 한 작품이에요. 그런 원칙에서 살면서 엄마, 아내, 아들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마지막에 브란 목사도 눈에 파묻혀 죽어가게 돼. 작품을 번역하면서 울었어요.”

“신(神)이 부여 했다고 생각하는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장면을 읽으면서 눈물이 납디다. 적어도 ‘우리도 비슷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나’ 라고 생각하게 됐지요. 쉴러에 대해 논문을 쓴 한 독문학자는 입센 작품을 보고서는 ‘나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부터 연극을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당시 입센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 연극은 발달하게 돼요. 입센 100주년 ‘인터내셔널 컨버런스’도 독일에 했잖아요. 독일은 입센이 자기 나라 작가라고 생각해요.”


― 입센이 작가로 변화되는 시기는.

“학자들이 구별을 한 건 아닌데 노르웨이 극장장과 무대 미술도 하고 작가, 연출을 하면서 노르웨이적인 작품들을 썼던 초기시기. <브란>, <황제와 갈릴리 사람>(1873) 같은 대작을 쓰던 때는 ‘인간이 원칙에 따른 삶을 살 것인가, 사회와 타협하며 살 것인가’ 하는 인간으로 근본적인 고뇌를 하던 시기였어요. 입센이 유명하게 되는 계기는 사회문제극 작품인 <인형의집>(1879) <유령>(1887) 등을 쓰던 시기도 중요하죠. 마지막 죽기 전에는 상징적인 작품들을 많이 썼고요. 마지막 작품은 예술가가(조각가) 주인공이에요. 극적 에필로그 <우리 죽어 깨어 날 때> 라고 붙였는데 진짜 입센의 에필로그가 되었죠. 그런데 극작술은 현재 시선으로 보면 올드패션이에요(웃음) 요즘은 ‘이머시브 시어터’까지 나올 정도로 연극문화가 바뀌었으니까. 그런데 입센 작품을 해체해서 현재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작품이죠.”


― 입센 작품은 국내에서도 공연도 되고 다양한 번역 책들이 나와 있죠?

“제가 입센 평전을 쓸 때 서문에 ‘한국 번역본은 참고하지 않겠다’라고 썼어요. 한 독문과 교수님이 쓴 ‘페르퀸트’는 번역이 안 좋아서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이 번역으로 ‘배우들 입으로 어떻게 말하지’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인명과 지명들이 다르다고 해서 작품 자체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닌데 말하는 대로 쓰는 게 번역의 원칙이죠.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남편의 문제로 문을 닫고 집을 나간 것 보다는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서 집을 나가죠. 밖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알아야 세상을 잘 살 수 있는지 나가는 거예요. 인형의 집 초기 번역은 일본 번역을 그대로 했거든. 노르웨이 원문 번역 책을 읽어 봤으면 좋겠어요. 노르웨이 사람이 아니라서 오역(誤譯) 없기를 희망하는데 노르웨이 언어로 ‘완역 헨리크 입센 희곡 전집’ 문장을 노르웨이 대사관 직원 한데 보여줬는데 엄지를 ‘척’ 들더라고요.(웃음) ”


― 번역을 하는 동안 자신과 싸움이 힘들었다고 말하셨지요.

“2019년부터 아프기 시작했어요.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으니까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프니까 능률이 안 올라 포기할 수는 없고 정말 끙끙대면서 번역을 완주 한 거예요. 건강했었는데 마지막에는 힘들었어요. 딸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불행 중 다행인지 코로나19 기간에는 비 연극인으로 살아서 연극 한 편 못 보고 번역 일에만 매달렸어요.”


― 그렇게 매달려 쓰신 23편의 입센 희곡에는 국내에서 공연이 안 된 작품들이 많을 텐데요.

“이번 완역으로 입센작품들 공연이 더 활발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번역을 하는 중에 LG 아트센터에서 ‘사회의 기둥들’을 공연했지요. 그 작품에서 나오는 용어들이 세월호 사건 용어들하고 똑같은 부분이 많아 공연 끝나고도 관객들이 일어나지 못했어요. 처음에는 다른 작품 하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이 작품을 LG아트센터가 선택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그 다음은 대선 기간이었는데 서울시 극단에 ‘왕위주장자들’이라는 작품을 추천했어요. 처음에는 ‘브란’이라는 작품을 보냈는데 제작 스케일도 커서 대선하고 맞는 작품이 선택된 거예요. 고연옥 작가가 각색하고 현대화 했는데 작품 평가가 좋았고요. 구자홍 선생이 명동예술극장에 계실 때 입센의 ‘헤다 가블러’를 박정희 연출, 이혜영 배우가 주인공을 맡았는데 이 작품도 애착이 가는 작품이고요. 더 많은 작품들이 공연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돈은 안 받을 테니 한국연출가협회나 연출가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입센작품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은 했어요.”


― 책을 내는 과정에서 문장과 오탈자 싸움을 하고 나면 탈진이 되더군요. 50여권을 쓰신다는 건 국제마라톤에서 완주를 하신일인데. 입센 희곡 완역으로 더 이상 번역과 문장과의 싸움은 노장으로 마지막인가요.

“언어를 힘들어하면서도 공부하려는 제자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솔직히 영어하고 독일어는 한국 책 보는 속도로 봐요. 특히 영어로 된 책 중에 요즘 현대적으로 주목 받는 ‘핫’한 전문 책들은 공역을 한다거나 최종 감수를 해서 도와주고 싶죠. 건강하니까.”


| ‘문학소녀’ 꿈은 여전히 진행 중.

“내가 문학소녀였거든요” 김미혜 교수는 어린 시절 문학소녀와 배우를 꿈꾸었고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대학(고려대학교 영문학과)은 전체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대학 3학년 때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을 써서 냈다. 기숙사비가 해결될 상금을 받던 시절이었다. 심사위원장이었던 현대소설의 거장(巨匠) 황순원 선생은 작품심사평에서 최종심까지 올라온 김 교수의 소설을 ‘글을 잘 쓴다’고 하면서도 나이가 적은 남자작품을 당선작으로 했다. 그때 아쉬움은 고희 중반을 넘겨도 여전히 번역과 책을 내고 싶고 소설과 방송대본을 쓰고 있는 이유다. “여려서는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교 신문 기자를 했어요. 신문 만드는 일이 굉장히 재미있었고 리포터도 해봤지요.” 문학소녀, 방송기자, 배우의 꿈은 결혼하면서부터 바뀌었다. “시집을 일찍 가니까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어요.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도 들고. 남편하고 이혼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웃음) 그래서 외무고시를 보려고 청계천에서 책을 사 와서 공부를 시작 했어요” 외무고시도 남편이 오스트리아 국비장학생으로 가면서 포기하게 되었다. 김 교수는 대학 졸업하고 7년 넘어서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영등포여중으로 발령 받아 영어 교사로 3년 정도 근무하게 된다.


― 교사를 포기하고 남편을 따라 유학을 가셨군요.

“남편이 올 수는 없는데 가야죠.(웃음) 유학보다는 남편 뒷바라지하려고 간 거예요. 요즘은 전 세계가 하루 생활권으로 사는 시대인데 그때는 그렇지 못했어요. 가서 보니까 당시 연구학문이 30년은 뒤처져 있다는 겁니다. 남편은 한국에서 박사 과정 밟을 생각도 없으니까 내가 간 거죠. 나는 그때 독일어를 전혀 못 했으니까. 유학을 간 게 아니고 살림하러 가는 건데 마음은 ‘내가 고려대학교를 1등으로 들어간 사람인데,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공부의 갈증은 있었어요’. 딸하고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면서 언어만 영어권이면 공부를 더 해볼 텐데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도착해서는 독일어를 모르니까 밖에 나가질 못했지요.”


― 독일어가 익숙하지 못하셨을 텐데 ‘연극학자’가 되셨군요.

“아버지가 떠날 때 6년 근 인삼을 많이 주셨어요. 오스트리아 ‘비인’대학에서 독일어 서머스쿨을 하는데 147개국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겁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인삼을 굉장히 좋아해서 그걸 팔아서 학비를 마련했지요. 석 달 후에 졸업식 비슷한 걸 하는데 내가 1등을 한 거예요. 매일 독일어로 수업하고 1시간 시험을 보고 끝나는 과정이었는데 독일어 시험이 한 개도 틀리게 없는 거야. 영어를 할 줄 아니까 독일어도 자심감이 붙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연극을 공부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를 하고 싶어서 연극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거던. 헌책방에서 영어로 된 ‘세계 연극사’를 사서 그 책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학기가 바뀌면서 영어 랭귀지 코스가 생겼어요. 모국어 시험도 내가 2등으로 붙으면서 7년 반 동안 연극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영어는 자신이 있어서 악착같이 붙들고 매달리니 다른 언어도 왠만한 건 마스터 하게 됩디다.”


―유학 시절 당시 동유럽 연극문화와 70∼80년대 우리 연극과 어떤 차이를 느끼셨나요.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김 교수는 40년이 넘는 유학 시절로 돌아갔고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말로 그려냈다) 아시아 여자가 연극학을 공부한다는 것 때문에 인기 ‘짱’이었어요. 한국 사람도, 아시아 사람이 아예 없었어요. 당시에 받은 충격이 오스트리아나 독일은 연극이 죽을까 봐 할리우드처럼 상업영화를 안 만들잖아요. 자국의 연극역사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거지. 영화도 페스티벌 출품작만 만들잖아. 연극학을 공부할 때는 연극만 보는 게 아니라 오페라, 댄스 시어터도 보고 다양한 장르를 볼 정도로 과제를 내주니까 공부를 안 할 수 없는 분위기예요. 영국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어요. 사람들은 예술의 도시 그러면 ‘파리’로 생각하는데 파리가 ‘세계문화예술 도시’가 되기 이전에 오스트리아가 세계적인 문화예술 도시였어요. 특히 오페라, 연극이 그랬죠.(김 교수는 탁자에 놓인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고는 잠시 쉬었다 하자고 했다)


―연극을 지키려고 할리우드 상업 영화를 포기한다는 것이 강렬하게 들립니다. 요즘 문화를 ‘보편적 문화’ 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문화는 ‘계층의 경계’가 없는 선택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야 할 텐데요. 특히 순수예술 분야와 연극은 지원체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더군요.

“무용, 오페라 ,연극 등 빈 시민들 전체가 향유할 수 있는 국가 시스템이 정말 부러웠어요. 이런 제도가 국민들의 민도(民度)를 높이는 정부 시스템이라고 판단하는 거죠. 낮에 채소 장사를 하고 오후 6시 되면 씻고 오페라와 연극을 보러 다니는 그런 문화예요. 그 당시에 우리나라는 정말 몇 사람만 연극을 보러 다녔던 시절이어서 더 충격적이었어요. 처음 과제를 하려고 본 뮤지컬 ‘스프닝 어웨이크닝’을 보고 놀란 게 뭐냐하면 무대에서 성적 일탈행위도 그대로 하는 겁니다. 문화 충격이 엄청났어요. 장주네의 ‘하녀들’도 노출 장면이 많았는데 중요한 것은 예술로 받아들인다는 거죠. 우리도 ‘외설’과 ‘예술’의 논란이 한때는 많았잖아요. 다른 점은 예술적인 감동도 크다는 겁니다. 축제도 빈 전체가 문화축제 분위기를 만들다 보니 국가 자체가 ‘문화예술을 정말 사랑하는구나’하고 느끼게 돼요.”


― 박사 논문이 ‘오스트리아 작가’에 대한 연구였죠? 외국 학위 논문 중에는 한국 전통연희와 작가들 공연작품들을 현지 현대연극과 비교 융합해 연구한 논문도 많은데.

“제가 연구한 것이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데, ‘프리츠 호크벨더’ 라는 작가예요. 그 작가 생전에 작품 전체가 공연된 작가였는데 ‘공연과 수용’이라는 연구 방향으로 썼지요. 지도교수도 한국연극과 비교하면 어떠냐고 하셨는데, 현실적인 이유로 ‘노’했어요. 자료 찾으러 한국 오가는 비용도 들고 힘들어서 동유럽 작가를 연구하게 된 거죠.”

김미혜 교수는 1987년 오스트리아 비인 대학교 연극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40세 즈음이었다. 당시에는 연극학 이론으로 교수 선발이 드물 때였다. 독어독문과에서 희곡을 가르칠까도 생각했는데 대학하고 인연이 닿지 않았다. 유학하고 돌아와서 지방 모 대학교에 지원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서울지역 대학으로 갈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4년제 연극학과는 국내에 5군데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김 교수는 대학에 갈 생각을 버리고 한국문학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달린다. “아직 열권을 채우질 못했는데 독일어로 번역된 책이 8권 정도 번역되어서 출판되었지요. 51세 때 한양대학교 연극학과에 박사과정이 생기면서 김 교수는 교수가 되는데 “최형인 교수가 내 얘기를 들었는지 그 인연으로 강사 생활을 6년 정도를 했는데도 교수를 안 뽑는 거예요. 이론으로 연극과 교수 되는 게 힘들던 시절이어서 교수가 되는 것을 일찍 포기하고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다가 박사과정이 생기면서 부교수로 들어가게 된 거죠.” 대학 임용 뒤 한양대학교 ‘베스트 티처상’을 세 차례 받았고 교육부표창(2014)을 받았다.


― 대학에서 ‘베스트 티처상’을 3차례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뭔가요?. 김미혜 교수의 영어 발음이 흘렀다.

“죽은 교육은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What is happening now’ 동시대 연극 현상이 대한민국 무대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제대로 분석하고 바라보는 게 중요하죠. 연극사를 다루면서도 우리나라 연극 현상과 무대를 비교하고 따끈한 해외 현대연극과 연결해서 가르쳤지요. 늘 외국을 가니까 그 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연극과 뮤지컬들을 연극사적으로 분석하기도 하고, 그런 방식으로 연극을 전달해 주려고 하니까 학생들이 좋아했죠. 필요한 교육이기도 하고요.”



| 연극인(학자) 김미혜, “좋은 교수가 되기 위해 글 쓰고 번역하는 일을 하게 됐지요.”

김미혜 교수는 교수가 된 뒤에도 다양한 연극 관련 전공 도서를 소개하고 한국연극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도서들 가운데 한길사에서 출판한 <부조리극>(2005)과 <모던연극의 초석 헨릭크 입센>(도서출판 연극과 인간, 2011>은 학술원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세기 위대한 연극인들>(2006, 살림출판사), <아방가르드 연극의 흐름, 1892~1992>(1997, 현대미학사) 책은 여전히 연극학과 대학가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이후 김 교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문위원을 거쳐 한국연극학회 12대 회장, 한국 연극예술치료학회 초대회장,(재)예술경영센터 비상근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이례적으로 월간 <한국연극> 편집 주간을 세 차례 연임해 맡게 된다.


― 이메일로 보내신 프로필을 보니까 한국연극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은 다하셨더군요.

“모르겠어요. 늦은 나이에 한국연극계에 들어오니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었어요. 맨땅에 헤딩하고 노력으로 하게 된 거예요. 단체가 생기면 나한테 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연극교재연구소’도 부탁해서 하게 됐어요. 내가 회장이나 직책을 맡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가 그렇게 되면서 연극계에서 많은 일들을 하게 된 것 같아요.”


― 하셨던 역할 중에 그래도 ‘연극학자’로 의미가 있었던 일은.

“오세곤 선생이랑 연극 교재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서 할 때였는데 이 시기에 중·고등 연극 관련 교재를 만들고 할 때지요. 연극교육이 각 중·고등학교에서 체계적인 과목으로 만들어 갈 시기였는데 1∼2년 정도 운영되다가 더 못하게 됐는데 보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 한국연극협회는 최종원 이사장이 계실 때 였는데 책을 보관할 수 있는 사무실 하나 없어서 한국연극협회가 해주어야 하지 않겠냐 하니까 도움을 받아서 하게 되었지요. 생각해보면, 최종원 선생이 연극계를 위해서 발로 뛰고 도와주려고 하는 모습이 고마웠어요. ‘의리남’ 이죠.


― <아우구스트 보알의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1988, 열화당) 책이 단독 번역서로는 처음 발간하신 책이더군요.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할 때 보 알이 워크숍을 하러 왔어요. 인원이 제한되어 있고 아시아 여자도 혼자니까 워크숍에 참여를 못 했는데 보알 목표가 ‘인간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었어요. 그 책이 보알이 직접 슨 책이 아니고 제자인 ‘헨리 토러’가 보알의 훈련에 관해서 쓴 거예요 그 얇은 책을 가지고 들어와서 번역하게 됐는데 출판사도 아는 사람이 없는 거야. 남편의 친구 동생이 열화당 출판사에 일하고 있어서 무작정 찾아가서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더니 거절을 안 해서(웃음) 그 책이 나오게 된 거죠.”


― 입센 완역까지 출판하신 책을 세워보니 50권에 육박하고 <해변의 카프카>도 연출을 하셨더군요. 당시 언론에서는 ‘연출의 섬세한 감성과 아름다운 무대가 돋보이는 연극’이라고 평가하던데.

“모르겠어요. 인생에 몇 권을 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욕심 부린 적도 없어요. 평생 책 쓰고 번역하니까 그렇게 쌓여 온 것 같고요. 좋은 교수가 되려고 글을 쓰고 번역하게 된 것은 맞아요. <해변의 카프카> 번역해 달라고 해서 만났는데 당시에 서울연극제 기간이었고 연출을 못구했던건데.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김미혜가 드라마터그를 1999년에 김광림 선생이 낭독극으로 공연한 ‘괴테 페스티벌’을 하면서 국내에서 처음 시작했으니 연출 하는 것에 부담은 없었어요. 그래서 번역비하고 연출료 1천2백만 원과 스텝에 제자들을 써주면 좋겠다고 하니까 일본 제작자도 오케이 해서 하게 된 건데 공연 끝내고 연출을 수십 년 한 연출자들이 공연을 보고 처음 연출하는 사람이 동숭홀 큰 극장 연출을 잘했다고 해서 평가가 좋았죠. 무슨 일이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해서 하게 되면 성과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번역하다 보니까 수십 권이 제 인생처럼 쌓여있게 된 거죠.”


― 한국연극에서 ‘드라마터그’ 역할이 이제는 필수의 시대가 되었죠.

“1999년도에도 ‘드라마터그’ 개념이 전혀 없을 때였어요. 김광림 선생이 예술의 전당에서 파우스트를 연출 의뢰를 받았는데 작품이 어려우니, 김미혜 선생이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셔서 하게 됐어요. 연습을 하면서 1, 2부에서 어려운 부분을 다 빼고 배우들하고 연습하면서 작품을 성공적으로 했어요. 그 뒤로 대작 같은 경우에는 드라마터그를 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게 되었어요. 그즈음 한국연극계도 드라마터그 개념이 형성되던 시기였어요. 특히 국립극단에서 독일 연출가들이 왔는데 번역뿐 아니라 독일 예술가들과 작품으로 소통하고 생소한 한국연극문화를 우습게 볼 수 없게 하는 역할도 중요하거든요. 독일 문학과 작품 얘기들을 들고 나오면 제가 나서서 정리하면 그다음부터는 배우와 스태프들을 자기들과 동등한 시선으로 보고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때 배우들한테 하던 말이 있어요. ‘내가 배우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독일 연출가가 우리 배우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독일 배우들과 똑같이 대접받게 해준 공로는 나한테도 있다’(웃음)라고요.”


―국내 대표적인 논객이자 언론학자인 강준만 선생은 글을 쓰는 것은 ‘고립’과 ‘중독’이라면서 200여권이 넘어 간 뒤에는 책 권수를 잊어버렸다고 하더군요(웃음) 다르지만, 김미혜 선생은 연극관련 서적을 국내에서 가장 많이 번역하고 써오셨는데. 책을 쓰고 번역하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

“삶 자체로 봐야죠. 평생을 이렇게 살다 보니까 자식 교육을 망쳤어(웃음). 자식 한 명을 연극학 공부를 시키고 싶었는데. 게가 그러는 거야. ‘엄마처럼 교수를 힘들게 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처음 봤다’는 겁니다. 영어도 엄마만큼 못하는데 교수가 될 수 없다고 석사까지 하고 유학은 포기하고 시집을 갔는데 잘살고 있어요. 교육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요즘은 동유럽과 한국연극문화 창작 환경을 비교하면 어떤가요.

“동유럽은 연극을 보는 문화도 생활이 되어있어요. 우리는 지금까지도 특별한 문화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고 그만큼 연극이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문화가 아닌 차이는 크죠. 이제 연극 교육도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더 나아질 것으로 생각되죠. 창작 지원 환경은 대한민국이 최고 좋아요. 동유럽과 우리나라의 복지의 개념이 달라요. 우리는 어렵다고들 하지만 창작 지원 환경이 그래도 잘 되어 있는 겁니다. 동유럽은 사회주의 국가여서 기본 생활을 다 해주니까 교육비, 의료보험은 거의 무료잖아요. 우리나라도 문화 지원, 문화 복지만 좀 더 보안이 되면 일류 문화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원 체계도 주기 별로 더 세분화해서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나이를 먹어도 움직일 수 있고 창작 능력과 예술적 영감이 있다면 보편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주는 게 좋을 것 같고. 사회 인프라가 형성 될 때 까지는 지원 제도를 늘려주어야 하고, 연극과 문화만큼 정치적인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김미혜 선생이 쓰신 책 중에서도 책장에 대략 12여권이 보이더군요.

“<부조리극>(한길사)을 봤으면 좋겠는데 헌책방에서도 구할 수 없는 책이 됐어요. 중고책도 한 30만원 한다고 해요. 한길사에서도 더 이상 찍어내지 않아서 구할 수 없는 책이 되었어요. 다음으로는 <모던 연극의 초석 핸리크 입센>하고 전집 작품은 다 읽지는 못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작품은 읽어 봤으면 좋겠어. 연출가들이 좀 더 읽어보고 좋은 작품들은 공연되었으면 좋겠고요. 우리나라 연출가들이 현대적인 해석으로 공연된 입센 작품이 ‘입센스튜디오’에 더 많이 걸려 있기를 바라죠.”


김미혜 선생은 번역으로 제4회 대산문학상(번역 부분)에 황동규 시인의 <풍장>(Windbestattung) 연작시 70편을 번역해 공동으로 수상을 했고 입센과의 인연은 그가 한국연극학회 회장이었던 2006년에 입센서거 100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세계 각국에서 무대화 되는 있는 입센작품의 사례발표에서 시작되었다. ‘입센 스튜디오’를 방문하면서 한국공연 자료가 없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는 허리가 아프고, 손마디가 아파도 자판의 속도로 입센만큼은 완주하고 싶었다. 정년(2014)을 한 지 4년 뒤 일간지 인터뷰에서 “여전히 할 일이 남아있다. 글을 쓰고 번역해서 책 두세 권을 더 내야하고 23편의 입센 희곡을 번역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4권의 책을 번역했고 8년이 지나면서 입센을 완주한 김미혜 교수는 국내 연극 분야에서 유일하게 ‘입센 전문가’로 통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나이 75세에 해낸 일이다.

피터 한트게를 전공한 남편 고려대 윤용호 명예교수는 평생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가장 듬직한 사람이 되어 주었고 자녀들은 그런 엄마를 응원했다. 그녀의 말을 들어 보면, 김미혜 명예교수는 배우, 문학소녀, 기자의 꿈을 이룬 것 같았다. 학자로 연극인 길을 걸으면서 연출을 하고 드라마터그와 평론하면서 배우 세계를 그려왔고 그의 인생에 중요한 지점에는 기자의 글로 화제가 되었다. 여전히 75세의 나이에 소설을 쓰면서 다시 문학소녀가 되어가고 있다. 쉬지 않고 달려온 김미혜 교수 연극 인생의 전환점은 마라톤 선수의 생수 한 통처럼 그 반환점에는 멈추지 않는 집념과 흔들리지 않는 뚝심의 마르지 않는 생수 한 통이 놓여 있었다. 김미혜 교수는 연극을 보러 극장으로 향했고 대선 뒤 휴일의 광화문 광장 태극기 깃발과 스피커 소리는 조용했다. 길가는 전국에서 청와대를 구경 나온 관광버스로 즐비했고 인파들은 넘쳐났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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