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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학자 김미혜 “입센 희곡 전집 번역은 내 마지막 봉사”

2007년 시작해 15년 만에 끝내… 제대로 된 번역 위해 노르웨이어까지 독학

연극학자인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가 지난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뒷편 뜰에서 새로 발간한 입센 희곡 전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입센 희곡 전집에 발간된 것은 처음이다. 김미혜 교수는 15년에 걸쳐 입센 희곡을 번역하면서 인명 등 고유명사와 대사의 뉘앙스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르웨이어까지 공부했다. 이한결 기자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의 ‘인형의 집’은 근대극 또는 사실주의 연극의 신기원이 된 작품이다. 1879년 9월 노르웨이에서 희곡이 출판되고 그해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초연된 ‘인형의 집’은 단숨에 유럽을 강타하는 문제작이 됐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등 유럽 각국에서 빠르게 번역돼 공연된 ‘인형의 집’은 여주인공 노라가 “아내이며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겠다”며 집을 박차고 나가는 결말 때문에 격렬한 논란을 일으켰다.

한국에서 1921년 ‘인형의 집’ 첫 번역

‘인형의 집’은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먼저 일본에서 신극 개량을 추구하던 연극인들과 여성 해방을 주창하는 여성 문인들이 1890년대 입센 소개에 나섰다. 그리고 1901년 ‘인형의 집’과 ‘민중의 적’이 처음 완역됐으며, 1906년 입센의 부고 소식이 알려진 후 입센회가 설립되는 한편 희곡들이 잇따라 번역됐다. ‘인형의 집’은 1910년대에만 일본에서 무려 6번이 번역될 정도였으며, 공연 역시 1911년 일본 초연 이후 여러 차례 무대화됐다. ‘인형의 집’ 이외에도 사회적 문제를 과감히 드러내는 한편 인간의 주체성을 추구하는 입센의 작품들은 일본 내에서 수많은 지지자들을 낳았다.

그리고 1910년대 일본의 입센 열풍은 당시 중국과 한국 유학생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일본에서 번역된 ‘인형의 집’을 토대로 1918년 중국, 1921년 한국에서 각각 첫 완역본이 나온 것이다. 한국에서는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양건식이 박계강과 함께 ‘인형의 가(家)’라는 제목으로 그해 1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61회에 걸쳐 매일신문 1면에 연재했다. 양건식은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판할 때는 제목을 ‘노라’로 바꿨다. 이어 이상수가 같은 해 ‘인형의 가’와 이듬해 ‘해부인(海夫人·바다에서 온 여인)’을 번역했고, 1934년 홍해성이 ‘유령’을 번역했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 위키피디아

국내에서 입센의 작품이 처음 무대화된 것은 1925년 9월 ‘한국 근대극 운동의 선구자’ 현철의 조선배우학교 1기 졸업생들이 선보인 ‘인형의 가’다. 이후 신문이나 잡지 등에 입센에 대한 정보를 담은 글이 꾸준히 실렸지만, 희곡 번역은 해방까지 더 이뤄지지 않았다. 공연 역시 이미 번역된 ‘인형의 집’ ‘바다에서 온 여인’ ‘유령’으로 한정됐다.

입센 100주년 국제 심포지엄 침묵이 번역 계기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입센이 세계 연극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교해 국내에서 번역이나 공연이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 번역 역시 일본어 대신 영어로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중역이었다. 영국을 넘어 전 세계의 연극 자산인 셰익스피어는 물론이고 러시아 사실주의 연극을 대표하는 안톤 체홉(1860~1904)이 국내에서 자주 번역 및 공연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1850년 ‘카틸리나’로 데뷔한 이후 1899년 ‘우리 죽어 깨어날 때’까지 모두 25편의 희곡을 쓴 입센의 작품세계가 ‘페르귄트’ 등 초기의 민족적 낭만주의극, ‘인형의 집’으로 대표되는 사회문제극, ‘들오리’로 시작되는 상징주의극으로 각각 나뉘는 것에 대한 분석도 당연히 부족했다. 이에 연극학자인 김미혜(74) 한양대 명예교수는 사명감을 가지고 2007년부터 입센 희곡 번역에 나섰다. 그리고 15년 만인 최근 국내에서 첫 입센 희곡 전집을 냈다. 지난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 교수를 만나 번역 과정을 들어봤다.

“1906년 입센 서거 100주기를 맞아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학술세미나에 참석한 것이 나를 입센 연구와 희곡 번역에 나서도록 만들었어요. 당시 27개국 학자들이 참석해 자국에서의 입센 연구 및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입센이 제대로 번역되거나 공연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 입센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또 창작자들이 무대화 할 수 있도록 희곡을 번역하게 됐습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기간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은 채 번역과 교열 작업에만 몰두했었어요.”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가 번역해 출간한 입센 희곡 전집. 연극과 인간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연극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 명예교수는 그동안 학자로서 연극 관련 전문 서적을 20권 넘게 출판했다. 또한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 사무국장과 한국연극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연극 현장에서 브레히트를 비롯한 여러 극작가의 희곡을 번역하는 한편 드라마터그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베를린에서 입센 국제 학술세미나의 충격을 안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영어와 독일어로 쓰인 입센 자료를 모으는 한편 노르웨이어 공부를 시작했다. 입센 희곡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 등 고유명사나 대사의 뉘앙스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노르웨이어를 아는 것이 필요해서다. 이와 함께 학술 지원 또는 사비로 노르웨이를 4차례 다녀오는 등 노르웨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그리고 입센 공부를 시작한 지 4년 만인 2010년 국내 첫 입센 연구서 ‘모던 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을 출간했다. 입센의 삶과 작품세계를 담은 이 책은 국내 연극계에서 입센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입센의 희곡은 근대정신을 잘 보여주는 작품

“한국에 제대로 된 입센 희곡 번역본이 없기 때문에 25편을 영어본과 독일어본으로 먼저 읽었는데요. 이들 번역본이 입센의 오리지널 텍스트를 잘 번역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입센 희곡을 원전으로 읽기 위해 노르웨이어를 배웠던 세계적 작가들인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처럼 나도 흉내라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모던 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은 노르웨이어 지식이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영어와 독일어 자료들을 토대로 한 만큼 고유명사 표기에 오류가 있습니다. 나중에 꼭 개정본을 내고 싶어요.”

김미혜 교수의 입센 번역 덕분에 2010년대 들어 그동안 국내에서 거의 공연되지 않던 작품들이 무대에 올랐다. 위부터 ‘헤다 가블레르’(2012년 명동예술극장), ‘사회의 기둥들’(2014년 LG아트센터), ‘왕위주장자들’(2017년 서울시극단). 명동예술극장·LG아트센터·서울시극단

김 교수의 번역 덕분에 2010년대 들어 그동안 국내에서 거의 공연되지 않던 ‘헤다 가블레르’(2012년 명동예술극장), ‘사회의 기둥들’(2014년 LG아트센터), ‘왕위주장자들’(2017년 서울시극단)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김 교수가 입센 희곡 전집 번역에 천착한 것은 “입센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극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영어권 편향이 되다 보니 북유럽 출신 극작가인 입센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내가 입센 희곡을 번역할 때 누군가는 ‘요즘 공연도 많이 안 되는 구닥다리 작품을 왜 하냐’고 말하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입센의 희곡은 근대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국 극작가들이 배울 점이 많다. 앞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입센의 작품들이 공연돼 한국 연극의 레퍼토리가 더욱 다양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입센은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페르귄트’ 등 운문으로 쓰인 초기 희곡들만 보더라도 주제의식이나 극작술 외에도 입센 특유의 언어 감각이 빛난다. 시 역시 장편 서사시 ‘테리예 비겐’ 등을 비롯해 많은 수작을 남기고 있지만 국내에선 하나도 번역되지 않았다. 김 교수는 “입센은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인물로 희곡 외에 시와 그림에도 능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입센의 시를 번역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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