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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문화전쟁 일으켰다’… 미, 낙태권 판결 발칵


미국 대법원의 낙태권 폐기 판결로 미국 내부에서 문화전쟁이 본격 시작됐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두고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내려진 판결이어서 갈등과 분열은 최고조로 달했다.

판결을 지지하는 보수당 우세 지역 상당수에서는 낙태 금지 조처가 즉각 단행되며 일대 혼란이 발생했다. 민주당 우세 지역은 ‘낙태권 보호지역’을 선포하며 원정 낙태 여성까지 보호하겠다고 나섰다.

국무부, 국방부 등 행정부처도 낙태권 폐지 판결에 즉각 반대하는 의견을 발표하며 주정부와 연방정부, 행정부와 사법부 간 갈등까지 표면화됐다.

남북 전쟁 이후 최악의 분열

텍사스주 매컬런에 있는 홀 우먼스 헬스 클리닉은 25일(현지시간) 낙태 수술이 예정됐던 환자 22명에게 전화를 걸어 낙태 수술 취소 사실을 알렸다. 전날 대법원이 임신 후 약 24주까지 낙태를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텍사스주는 대법원판결이 내려지면 30일 후 자동으로 낙태가 불법화하는 이른바 ‘트리거(방아쇠) 조항’이 마련된 상태다. 혹시라도 낙태 수술로 처벌을 받을까 우려한 병원 측이 선제적 조처를 한 것이다.

낙태 수술을 멈춘 곳은 이곳뿐만이 아니다. 미주리, 루이지애나주는 대법원판결 직후 낙태가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아칸소주 리틀록의 한 병원은 대법원 결정이 온라인에 공개되자마자 문을 닫았다. 앨라배마, 오클라호마, 애리조나, 켄터키, 사우스다코타, 위스콘신, 웨스트버지니아, 아이다호, 테네시 등 연계 조항을 둔 다른 주에서도 임신 중절 수술이 속속 중단됐다.

AP통신은 “앨라배마의 한 병원에서는 대법원판결 이후 임신중절 수술을 할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기실이 눈물바다가 됐다”고 전했다. 웨스트버지니아의 한 병원 관계자도 “온종일 (낙태 수술이 예정됐던) 환자 수십 명에게 취소 전화를 돌렸다”며 “환자들이 충격 속에 말을 잇지 못했고, 일부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해결책을 구했던 환자들의 삶이 갑자기 바뀌게 된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NYT)는 “13개 주가 트리거 조항을 두고 있고, 최소 9개 주에서 이날 낙태가 금지됐다”며 “여성들은 주 경계를 넘어 낙태가 허용되는 곳으로 여행계획을 세웠다”고 보도했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를 둔 주 정부는 낙태 시술 보호조치를 도입하며 이들을 보호할 계획을 발표했다.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는 이날 낙태가 불법인 주에서 출산 관련 의료 서비스를 받으러 미네소타로 오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제이 인슬리 워싱턴 주지사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출산과 관련한 선택의 피난처 지역이 되겠다”며 “주 경찰이 낙태 시술을 받으러 워싱턴주로 온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다른 주가 제기한 어떤 인도 요청도 따르지 말도록 행정명령을 발령하겠다”고 말했다. 인슬리 주지사는 원정 낙태 환자를 위한 100만 달러 규모 지원금도 약속했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도 원정 낙태 희망자를 돕기 위해 1억2500만 달러의 예산을 요청하고, 낙태권을 강화하는 법률에 서명했다. 법안에는 낙태 시술을 하거나 이를 도와준 사람, 낙태 시술을 받은 사람을 상대로 다른 주에서 제기할 소송에 대비해 이들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임스 레티샤 뉴욕주 법무장관도 “뉴욕은 낙태를 찾는 누구에게라도 안전한 대피처가 될 것”이라며 원정 낙태 지원 견해를 밝혔다. 그레천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는 낙태권 유지를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우겠다고 말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성명을 내고 “대법원 결정은 직장 내에서, 또 전 세계적으로 우려와 의문을 낳고 있다”며 “국무부는 모든 직원이 거주지에 상관없이 산부인과 시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도 “(군인들의) 산부인과 시술 접근에 있어 어떤 차질도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 규정을 자세히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낙태권 폐지 판결에 대한 찬반 시위도 미 전역에서 발생했다. 워싱턴DC에 있는 연방대법원 청사 주변에는 낙태권 옹호 시위대가 이틀째 시위를 이어갔다. 대부분 지역에선 평화로운 시위가 열렸지만, 애리조나주 주도 피닉스에선 낙태권 옹호 시위자 일부가 주의회 의사당 창문과 문을 발로 차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였고, 현지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해 이들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오리건주와 뉴욕주에서도 낙태권 옹호 시위대 수십 명이 체포됐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는 찬반 시위대가 충돌해 6명이 체포됐다. 콜로라도주 롱몬트의 한 낙태 시술 병원은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가 발생했다. 불이 난 병원 벽에는 “낙태는 안전하지 않다”고 적힌 낙서가 적혔다.

아지즈 후크 시카고대 로스쿨 교수는 “로 대 웨이드 판결 무효화는 폭력적인 갈등의 또 다른 물결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WP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드렐르는 “이번 판결은 미국 문화 전쟁의 불길에 휘발유를 끼얹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보수가 장악한 대법원, 정치판 흔든다

낙태권 폐지 판결은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한 명의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들이 만장일치로 정의의 저울을 뒤집고 여성의 기본권을 박탈했다”며 “잔혹한 진실은 이 판결이 가난한 여성과 소녀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다는 점”이라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명한 판사들이 낙태권 폐지를 주도했다는 점을 꼬집으며 당파적 대결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 보수성향의 대법관이 대법원을 장악한 뒤 이념 갈등이 첨예한 논쟁적 주제에서 보수 측 손을 들어주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미 대법원은 지난 23일에는 공공장소에서 권총 휴대를 금지한 뉴욕주 법이 총기 소유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2조를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전날 법 집행 공무원이 ‘미란다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할 수 없다는 판결도 내렸다. 미란다 원칙은 범죄 용의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 보수성향 대법관 6명이 모두 공권력의 손을 들어줬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중간선거에서 낙태권에 찬성하는 후보를 뽑아 의회에서 낙태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WP는 “총기 규제와 낙태는 모두 올해 중간 선거와 2024년 대통령 선거를 재구성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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