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단도 늦게 뗀 ‘고교 자퇴생’, 수학계 ‘노벨상’ 안았다

한국계 최초로 필즈상 수상 쾌거 허준이 교수
“초등학교 때 수학 답지 베끼다 아버지에게 혼나”
과거 인터뷰서 한국 입시 수학에 쓴소리 하기도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석학 교수(오른쪽)이 5일(현지시간)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학교에서 국제수학연맹(IMU)이 수여하는 필즈상을 수상하고 있다. 한국계 수학자가 필즈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레티쿠바 제공

“구구단 떼는 것도 늦었다. 초등학교 때는 수학 문제집 답지를 보고 베끼다가 아버지에게 혼나기도 했다.”

5일(현지시간)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39)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석학교수는 어린 시절 ‘수학 영재’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한국계 미국인인 허 교수는 아버지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와 어머니 이인영 서울대 노어노문과 명예교수의 미국 유학 시절인 1983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허 교수의 필즈상 수상은 한국 수학자로서는 최초 수상이다. 한국계나 한국인이 이 상을 받은 적은 없었다.

허 교수는 미국 국적이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한국에서 다녔다. 서울대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쳤고 대학원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처음 미국으로 건너 간 ‘토종 수학자’다. 허 교수의 수상은 한국 수학계의 쾌거로도 볼 수 있다. 허 교수의 리드 추측에 대한 선행 연구도 서울대 석사 과정에서부터 시작됐다.

세계 수학계가 천재 수학자로 주목하는 허 교수는 구구단도 초등학교 2학년이 돼서야 다 외울 만큼 어린 시절 수학에 특별한 재능은 없었다고 한다.

허 교수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문제집을 풀게 했는데 몰래 답안지를 보고 베낀 일화를 소개했다. 아버지가 답안지를 모두 잘랐는데 서점에서 같은 문제집을 펼쳐 답을 적었다가 혼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시인이 되고 싶어 자퇴했다.

그는 자퇴 후 검정고시를 봤고 2002년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에 입학했다. F학점을 너무 많이 맞아 11학기를 다녔다.

그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대학시절 과학 기자를 꿈꾸기도 했다.

‘늦깎이’로 수학계 입문…난제 잇따라 해결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 연합뉴스

허 교수는 서울대 학부 졸업반 때 일본의 세계적 수학자인 히로나카 헤이스케 하버드대 명예교수의 수업을 들었다.

이 수업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수학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허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 석사(수리과학부)를 마친 후 미시간대에서 박사(수학) 학위를 받았다.

필즈상 수상자 대부분이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과 다르게 허 교수는 ‘늦깎이 수학자’였던 셈이다.

허 교수는 박사과정 1학년 때인 2012년 리드(Read) 추측을 시작으로 강한 메이슨(strong Mason) 추측, 다우링-윌슨(Dowling-Wilson) 추측 등 난제를 하나씩 증명하며 수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 2017년에는 다른 두 명의 수학자와 함께 로타 추측 증명에 성공하면서 ‘수학계의 정점에 섰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수학계에서는 허 교수 같은 ‘늦깎이 수학자’가 이 같은 성과를 낸 것에 대해 ‘18세에 처음 테니스 라켓을 잡은 선수가 20세에 윔블던 우승을 한 것과 같다’는 비유가 나온다.

“한국 학생들 수학 스트레스…입시 구조가 문제”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 연합뉴스

허 교수는 과거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한국의 입시 구조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허 교수는 한국 학생들이 수학 스트레스가 심한 것에 대해 “수학이 문제가 아니라 입시 구조가 문제”라며 “수학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내년부터 입시에 수학을 안 넣겠다고 하면 (수학 스트레스가) 바로 해결되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는 수학 계산 훈련에 대해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으려면 알파벳부터 배워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니 수학 공부를 많이 하는 한국 학생들이 뜻밖에 수학을 접한 정도가 낮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수학의 본질보다는 문제 풀이에 집중하는 학습이 이뤄지고 있다는 취지다. 그는 “한국 입시 수학의 병폐”라고 했다. 허 교수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처음엔 수학이 재미있었지만, 입시와 연관돼 있어 수학의 기쁨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었다.

허 교수는 ‘수학을 잘한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특별한 재능이나 천재성을 꼽지는 않았다. 허 교수는 앞서 유튜브 채널 ‘카오스 사이언스’ 인터뷰에서 “수학자들의 99.99%는 보통 사람들”이라며 “대부분의 수학자들은 평범해 재미가 없다. 일하고 퇴근한 후 장을 보고 공부하는 일상을 보낸다”라고 했다.

그는 “수학을 잘하는 사람들은 수학을 정말 재밌어 하는 사람들”이라며 “자투리 시간이 나면 유튜브 보는 것 보다 한 번 더 문제를 풀어보는 게 좋다는 사람이 수학을 잘한다”고 했다. 또 “깊이 생각하고 하나에 대해서 오래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수학을 잘한다”고 설명했다. 수학 능력은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고 연습을 통해 기를 수 있는 능력이라고도 했다.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은 이전까지 총 60명이 수상했다. 미국과 프랑스 출신자가 많다.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인이 3명, 중국계 미국인 1명, 베트남계 프랑스인 1명 등이 받았다.

‘수포자’에서 수학계의 정점에 선 허 교수는 시상식이 열린 핀란드 헬싱키 현지에서 연합뉴스와 만나 “최근 10~20년 사이 한국 수학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허 교수는 안정된 대학과 정부의 지원을 강조하면서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가 늦기는 했지만 조건 면에서 이제 동일선상에 선 것 같다”고 했다. 또 “한국 수학계가 발전해 나가려면 연구자가 마음 편히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잘 갖춰져야 한다”며 장기적인 투자를 강조했다.

허 교수는 특정 난제에 집착하기 보다는 ‘포기할 줄 아는 자세’도 강조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이를 악물고 해서 5년 이내에 풀어내겠어라고 한다면 공부하는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럽다”며 “문제를 하나를 정해두고 집착하면 마음도 힘들고, 마음이 힘들면 발상이 너무 경직된다”고 했다.

허 교수는 “가끔 놔주는 시기가 있으면 계속 새로운 방식으로 실패하면서 자기가 시도하고 탐험해보는 영역을 조금씩 넓혀갈 수 있다”며 “그 과정에서 원래 목표가 아니더라도 뭔가 새롭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허 교수는 “순수수학은 본질적으로 놀이”라며 “이대로 조용히 열심히 공부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처음 마주했을 땐 절대 내가 못 할 것 같은 일들이 이뤄진다. 정말로 어려운 문제에 중요한 발상을 얻어냈을 때는 내 한계를 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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