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은 풍족하나 속은 썩어버린 고령층...성숙한 방어기제, ‘기부’로 승화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기부]
고령층 자산 증가 뚜렷
정신질환, 자살률도 급증
근원적 내면문제 상존
성숙한 방어기제, ‘기부’로 승화

우리나라 60세 이상 고령층의 자산은 해마다 증가했지만, 고령층의 내면 상태는 되레 피폐해지는 모습을 나타냈다. 전문가들은 고령층이 문제를 얼마나 성숙하게 대처하는지, 어떤 종류의 방어기제를 선택하는지에 따라 정서적 질이 크게 좌우된다고 분석했다. 기부와 같은 성숙한 방어기제로 대처하면 문제의 짐을 효과적으로 덜 수 있다. 국민일보DB

1998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에서는 흥미로운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는 사람들이 특별한 생각이나 행동을 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고찰하는 것이었다. 그 특별한 생각이나 행동은 바로 다른 사람을 돕는 ‘이타적인 것’을 의미했다.

나이가 많은 피험자들(연구대상으로 연구에 참가한 사람)의 침에는 면역항체 ‘lg A’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피험자들이 고독이나 근심,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침이 말라 해당 항체가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연구를 주관한 대학교수는 이때 피험자들의 ‘lg A’ 수치를 조사해 기록했다. 그런 다음 교수는 피험자들에게 한 영화를 보여줬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마더 테레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였다. 교수는 이를 통해 면역항체인 ‘lg A’ 수치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피험자들의 ‘lg A’ 수치가 실험 전에 비해 확연히 높게 나타난 것이다. 교수는 이타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되면 몸 속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나 면역력이 높아지고 활력도 돋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령층 자산 증가했지만
우리나라 60세 이상 고령층의 자산은 매년 눈에 띄게 증가했다. 통계청의 60세 이상 가구주 자산현황 추이에 따르면 2012년 2억7000만원이었던 고령층의 평균 자산은 지난해 4억6000만원으로 크게 늘었다. 이처럼 고령층의 자산 증가는 부동산 등 사회의 구조적인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구기보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는 “주로 고령층이 부동산 자산 비중이 큰 점을 감안할 때 최근 5년 간 부동산 가격 폭등이 고령층 자산 증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2011년에 우리나라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 규모가 2만2000달러였지만, 지난해에는 3만5000달러로 크게 증가했고, 수명연장 및 베이비붐 세대의 고령층 편입 등에 따라 고령층 규모 자체가 커진 것도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고령층 자산이 증가했다고 그들의 삶이 마냥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았다. 고령층의 물리적인 측면이 충족되는 시기에 고령층의 정신적인 측면은 되레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고령층 우울증 등 정신질환 관련 진료 현황’에 따르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60세 이상 고령층은 2010년 약 30만명에서 2020년 60만명 가까이 급증했다. 정신질환을 앓는 고령층이 많아진 만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고령층 비율도 두드러졌다. 보건복지부 자살예방백서의 2020년 기준 ‘인구 10만명당 연령대별 자살률’을 보면 60세 이상 고령층의 자살률이 눈에 띄었다. 80세 이상 고령층 62.6명, 70대 38.8명, 60대 30.1명으로 다른 연령대에 비해 높았다. 이는 전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근원적 내면문제 상존
고령층은 내외부적인 환경 변화 등에 따른 근원적인 내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문제를 야기하는 우선적인 원인은 건강 악화다. 나이가 듦에 따라 젊은 시절 유지했던 신체 기능 및 건강 상태를 상실해가면서 내면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대인 관계 축소도 중요한 원인이다. 가족 및 지인의 사망과 단절, 자녀들의 독립 등으로 과거의 풍성했던 대인 관계가 급격히 축소돼 악영향을 미친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교수는 “과거 인간은 동굴에 모여 살았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사회적 동물이었다”며 “본성에 기반해 사회적으로 네트워크가 연결돼야 하는데, 단절 상태에 빠진 (고령층이) 굉장히 많고 고독사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역할 상실도 원인으로 꼽힌다. 사회적인 지위와 역할은 인간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여겨진다. 과거에 충분히 가졌던 이 정체성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축소되거나 사라지기 쉽다. 이는 자존감 하락 등 고령층의 내면 문제 악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아울러 고령층이 됐을 때 부부 간 소통의 문제가 본격화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강동우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과거 자녀들을 키울 땐 문제가 있어도 그러려니 하며 지내왔지만, 이제 자녀들이 다 독립하고 둘만 남게 되면 부부 간 정서적 소통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고 진단했다. 이어 “고령층이 되면 믿을 건 배우자밖에 없는데, 잠재된 원망 및 갈등 폭발로 그 관계마저 악화하면 노년기에 미치는 심리적 타격은 상당하다”고 덧붙였다.

A씨는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가난과 싸웠다. 여기서 벗어나고자 악착같이 돈을 벌어 큰 부를 거머쥐었다. 돈과 부는 그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다. 이것만 성취하면 마냥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과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 악화와 대인 관계 축소는 가속화됐다. 유일하게 의지했던 배우자와도 이별했다. 노년기에 이르러 물질적인 풍족함은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돈 이외에 새로이 의미있는 목적도 찾지 못했다. 혼자 남은 그가 한 일은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는 것 뿐이었다고 한다. “나는 외롭다. 나는 편지를 쓰지만 편지를 받을 대상은 없다. 내 집에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활력도 없고 희망도 없다.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기부로 승화
고령층의 내면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긴 어렵다. 인간의 근원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얼마나 성숙하게 대처하는지 여부가 핵심이라고 입을 모은다. 즉 어떤 종류의 ‘방어기제’를 선택하냐에 따라 그 사람의 정서적인 질이 크게 좌우된다고 분석했다. 만약 불안 등 미성숙한 방어기제로 문제를 대처하면 악순환의 반복이다. 하지만 성숙한 방어기제로 대처하면 문제의 짐을 효과적으로 덜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기부’가 꼽힌다.

강 교수는 “근원적인 내면의 문제를 성숙한 방어기제, 기부나 유머 등으로 ‘승화’시키면 건강하게 잘 대처를 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특히 노년기는 생산성이 많이 떨어져 힘든 시기인데, ‘기부’라는 행위 자체가 무언가에 기여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생산성과 연계되는 것”이라며 “이것이 주는 지속적인 충족감, ‘승화’의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심리학과 교수는 기부의 소통 강화 측면을 주목했다. 그는 “고령층에게 있어 단절된 네트워크가 복구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며 “나눔을 통해 스스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이고 약자와 함께 공생할 수 있다는 소통 심리가 자극되는데, 이는 (고령층에게) 정서적으로 큰 상승 작용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사장으로 적잖은 부를 축적한 B씨는 노년기에 이르러 지금껏 제대로 해보지 않았던 봉사활동과 기부를 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부인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쳤다. 부인은 그에게 십일조를 하듯이 일정 금액을 매달 기부하고, 평일과 주말에 시간이 날 때 독거노인들 배식 봉사 등을 하자고 했다. 초기에 B씨는 기부, 봉사 활동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내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사업을 하고 돈을 벌 때의 기쁨은 일시적이었고, 가슴 한 켠엔 항상 공허함이 존재했다. 이는 근원적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사업 활동에서 채워지지 못했던 무언가가 기부, 봉사를 하면서 비로소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며 “이 같은 충족감과 보람은 결코 일시적이지 않았고, 오랜 기간 내 자신의 정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노년의 삶에 활력을 제공했다”고 덧붙였다.

월드휴먼브리지의 특별후원자그룹인 ‘브리지소사이어티’의 유산기부 위원인 김동호 목사는 삶이 얼마남지 않은 노년에 그 어느 때보다 잘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잘 사는 것은 곧 기부를 통해 자신의 재산을 ‘잘 쓰는 것’이라고도 했다. “부자로 사는 게 잘 사는 게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잘 쓰는 게 잘 사는 겁니다. 유산 기부도 결국 삶의 마지막에서 유산 안 남기고 다 쓰자는 운동 아닌가요. 심지어 나는 돈뿐만 아니라 암도 쓰기로 했습니다. 암에 걸린 상태에서 여러 방법으로 나누고 위로했더니 사람들이 이전보다 열 배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암을 은사처럼 활용해 이룬 성과들은 상상을 초월하죠. 잘 쓴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최경식 기자 ks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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