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도 된다던 1호선 바로 멈췄다…지옥같던 퇴근길 [르포]

승객 가득찬 버스는 정류장 패싱
역사 내는 물 차올라 무정차, 차량 위 구조 기다리기도
또 물폭탄 예고된 9일 퇴근길은 안전하길

신도림역에서 강제하차한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에 몰렸다. 이찬규 인턴기자

말 그대로 ‘물폭탄’이었다. 26년 인생, 이런 날이 없었다. ‘80년 만에 중부지방에 내린 기록적인 폭우’라는 기사 문구 그 자체였다. 8일 밤 여의도에서 인천까지 퇴근 길은 평소 1시간 10분 정도 걸리던 것의 2배 이상 더 걸렸다. 그러나 취재해보니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퇴근길이었다.

대중교통 이용하라면서요, 타도 된다면서요...
8일 오후 6시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건물 앞. 비가 세차게 내린다. 이찬규 인턴기자

“찬규씨 오늘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 혹시 모르니까 먼저 퇴근하세요”

8일 오후 5시 35분, 정식 퇴근 시간이 25분 남았을 때 한 선배가 따뜻한 말을 건넸다. 예정된 저녁 미팅 때문에 그때 바로 집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 땐 이미 한참 늦었다.

미팅을 끝내고 여의도 한 카페에서 나선 시간은 오후 9시 40분. 뒤늦게 확인한 안전 안내 문자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애플리케이션에서도 대중교통은 정상 운행된다고 했다.

안전 재난 문자에서는 대중교통 이용을 권고했다. 문자 캡처

이 같은 안내에 폭우 속에서도 신발과 옷이 비에 젖을 뿐 집에 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오후 9시 42분 국회의사당역 버스정류장에서 10번 버스를 타고 영등포역으로 향했다. 버스가 영등포 고가차도에 오르고서야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가차도 위에서만 25분 넘게 버스가 기어갔다. 탑승한 지 40분 만에 버스에서 내렸지만 정류장 앞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폭우가 내린 8일 밤 영등포역에 운행중단 안내문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사람들로 가득찬 줄은 차도 위까지 이어졌다. 쏟아지는 빗속에 사람들의 우산이 서로를 치고, 누군가는 물을 뒤집어썼다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혼란의 원인은 영등포 역에 도착해서야 알 수 있었다.

영등포역 역무원은 개찰구 앞에서 “1호선 하행선 운영하지 않습니다. 인천행을 탈 수 없습니다”라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전자 안내판에는 선로 침수로 인해 개봉역부터 오류동역까지 운행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늦은 저녁 10시가 넘은 시각, 개찰구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승객들의 얼굴엔 도대체 어떻게 집에 가야할 지 걱정이 가득했다.

퇴근길을 동행했던 친구 A씨는 “우린 답을 찾을 거야. 늘 그랫듯”이라며 다른 방안을 찾자고 했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다시 버스를 타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인천행 1호선 대신 서동탄행 열차를 타고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7호선으로 환승해 부평구청역으로 향해 인천에 가는 ‘묘수’를 고안해냈다.

우리의 이 같은 대책에 대해 역무원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신도림역에서 10여분간 정차했다. 결국 하차해야 했다. 이찬규 인턴기자

신도림역사 내에 물이 들어와 일부 구간이 파손됐다. 이찬규 인턴기자

그러나 안도는 찰나였다. 영등포역에 올라 탄 전철은 다음 역인 신도림역에서 멈춰섰다.

“금천구청역 차선 차로 침수로 인해서 역마다 열차 출발이 늦어지고 있습니다”라는 기관사의 말이 3번이나 반복됐다.

10여분을 기다려 들려온 역무원의 안내방송은 좌절 그 자체였다. 역무원은 “1호선 모든 하행선 운영을 중단합니다. 모두 하차해주기 바랍니다”라고 밝혔다. 서동탄행을 비롯해 수원, 천안행 열차도 운영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신도림역에서 강제하차한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에 몰렸다. 이찬규 인턴기자

역에서 내린 사람들은 말 그대로 ‘멘붕’ 상태에 빠졌다. 모두 우왕좌왕했고,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고, 앱을 이용해 택시를 잡거나 길을 찾았다.

스마트폰을 활용해 길을 찾는 일 등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에게 이날 상황은 더욱 막막해 보였다. 신도림역에서 버스를 찾아 가던 길, 기자에게 길을 물어본 어르신만 5명이나 됐다.

아무것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5명 중 4명이 인천으로 가는 방법을 물었기에 그나마 확신을 갖고 버스 번호를 알려드렸다.

인천으로 가는 88번 버스가 정류장을 '패싱'했다. 이찬규 인턴기자

그러나 정작 인천행 버스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차 우리를 ‘패싱’했다. 우리가 타야 하는 88번 버스를 수차례 놓치고 나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란 판단이 선 순간 7호선 지하철이 있는 온수동으로 간다는 660번을 발견했다. 한번도 타본 적 없는 버스지만, 무작정 올라탔다.

버스 기사는 온수역까지 우회해서 가기 때문에 1시간 넘게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어 보였다. 다행히 온수역까지 가기 전인 천왕역을 발견해 하차했다.

애플리케이션에서 안내하지 않는 길을 찾아 천왕역에 도착했다. 이찬규 인턴기자

힘겹게 도착한 천왕역도 계단을 따라 물이 역사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7호선마저 운행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가나 눈앞이 컴컴했다. 다행히 역무원의 입에서 “운행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인천까지 쭉 지하로 연결된 7호선에 올라타니 겨우 안심이 됐다. 중간중간 열차가 서고 방송이 나올 때마다 마음을 졸였지만, 9일 오전 12시11분 집 근처 역인 인천시청역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2배 넘게 걸려 부평구청역에 도착했다. 이찬규 인턴기자

총 2시간 27분의 대장정을 거쳐 날이 바뀌고서야 집에 도착한 것이다. 평소 1시간 10분 정도 걸렸던 통근 시간의 2배가 걸렸을 뿐 아니라, 2번 환승하던 길을 5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또 폭우 예보…“9일 퇴근길은 제발 다르길”

용인서울선 고속도로에 산사태가 발생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지옥 같던 퇴근길에 동행했던 A씨는 “비 오니 열차에서 내리라고만 하면 다인가. 폭우 예보에 버스도, 선로도 대비가 안된 건 아니냐”고 화를 냈다.

폭우로 인해 도로가 침수되자, 차량에 올라타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그런데 우리의 퇴근길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고속도로에 산사태가 발생하기도 했고, 차로 퇴근하던 길 차가 침수해 발을 동동 구른 이들도 숱하게 나왔다. 침수한 차 지붕 위에 올라 구조대의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의 모습도 포착됐다.

지붕이 무너져 물이 차오른 이수역.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서울 시내 대중교통은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졌었다. 서울 동작역은 물이 역사에 쏟아져 폐쇄돼 무정차 통과됐고, 2호선 신대방역은 도림천 범람으로 50여분간 내외선 열차 모두 무정차 통과했다. 7호선 이수역은 지붕이 무너지며 물이 차올라 무정차 통과했다.

이런 상황에 한 누리꾼은 논현역에서 보라매역까지 걸어 퇴근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물에 싹 다 젖고 지나가면서 역류하는 물을 맞았다. 택시도 안 태워줘서 서러웠다”는 그의 퇴근길 은 무려 5시간 30분이 소요됐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삼성역 4번 출구 근처가 침수돼 출입할 수가 없었다. 트위터 캡처

구로에서 거주하는 B씨(29)는 강남까지 출퇴근한다. 그는 “8일을 생각하면 악몽 같다. 교통이 마비됐는데 어떻게 집에 갔었나 신기할 따름이다”며 “오늘 퇴근길도 걱정된다. 무사히 집에 갔으면 한다”고 밝혔다.

9일도 폭우가 예고돼 있다. 8일의 악몽을 뒤로 하고 이날 퇴근 길은 안전하고 쾌적한 퇴근길이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찬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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