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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조선도 ‘물폭탄’… 관리 소홀 처벌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H. 카(Edward Hallett Carr)


지난 8일 서울과 경기를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서울 강남·서초구 일대는 8~9일 이틀간 시간당 100㎜가 넘는 강수량을 기록했다. 수도권 교통도 마비돼 시민들이 출근길 극심한 불편을 겪었다. 서울 지하철 9호선과 3호선 일부 구간은 운행이 중단됐다.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서부간선도로, 동부간선도로, 내부순환로 등 주요 도시고속도로도 통제와 해제가 반복됐다.

인명 피해도 잇따랐다. 중대본에 따르면 9일 오후 7시 기준 이번 폭우로 인한 사망자는 9명(서울 5명·경기 3명·강원 1명), 실종자는 6명 발생했다. 서울 서초구에서는 하수 역류로 뚜껑이 유실된 맨홀에 4명이 빠져 실종됐다. 80년 만에 내린 기록적인 폭우다.

1925년 대홍수로 용산 일대가 침수된 모습.

‘여러 날 동안 큰비가 내리니 수재(水災)가 있을 것이다. 수문(水門)의 전방(箭防)을 속히 걷어치워 수도(水道)를 통하게 하고, 순찰하는 관원과 병조에서는 밤새도록 순시하여 사람을 죽는데 이르게 하지 말라’ - 『세종실록』

조선왕조실록과 증보문헌비고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발생한 홍수에 대해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비가 많이 오면 ‘큰비가 내렸다’고 적었으며 홍수가 났으면 ‘큰물이 졌다’고 표현했다. 홍수로 피해가 생긴 경우에는 인명 피해와 가옥 유실, 가축 피해까지 상세히 기록했다.

“도성 내 개천이 큰비로 넘쳤다…”

태종 7년(1407) 5월 27일 첫 홍수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세종 9년(1427)에는 경북 상주에 큰비가 내려 산사태로 7명이 죽고 43호의 가옥이 떠내려갔다. 선산·의성·함창·군위 등 고을에서도 민가와 사찰들이 떠내려가거나 파묻혔다는 경상감사의 보고가 있었다.

세조 13년(1467) 5월 27일에는 침수에 대한 기록이 있다. “큰비로 한강이 넘쳐서 물의 깊이가 30척(약 6.2m)이 되었다. 이에 병조에 전하여 백성들을 옮기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 한강대교 기준 지정홍수위는 4.5m, 경계홍수위는 8.5m, 위험홍수위는 10.5m로 정해져 있다. 한강이 넘쳐 평지의 깊이가 6.2m나 됐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홍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명종 2년(1547)에 전국적인 홍수가 발생했다. 명종은 “올해의 수재는 팔도가 다 그러한 것이나, 이 장계를 보니 수백 년 내에 없었던 재변이다. 재변을 당한 곳의 피해와 빠져 죽은 사람 수를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할 일을 감사에게 하유하라”고 지시했다.

이처럼 피해가 발생하면 지역에서 수집된 자료가 각 도의 감사에게 보고됐다. 감사는 이를 종합해 중앙에 보고한 후에 즉시 구제 대책을 세워 시행했다. 홍수 재해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대응 전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해 보고를 늦게 하거나 대책을 소홀히 한 관리에 대해서는 엄중히 책임을 물었다. 관리가 측우기의 강우량 측정과 수표에 의한 수위 측정을 게을리했을 때는 임금이 책임을 직접 묻기도 했다. 모든 재해의 원인을 천재(天災)로 돌리는 현실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내용이다.

배규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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