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받아와’ 꾐에 빠진 베트남 女유학생의 최후

소개팅앱 통해 보이스피싱 조직과 연결
법원, 징역 1년 4개월 선고
“의심스러운 사정 외면·용인 판단”


지난 21일 재판장이 이름을 부르자 체구가 작고 앳된 얼굴의 여성이 피고인석에 섰다. 긴장한 눈의 여성은 20대 초반 베트남 유학생 A씨. 통 넓은 바지 등 옷차림새가 또래 한국인 대학생들과 다를 바 없었다. 재판장은 “피고인 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며 “판결문 낭독 중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중단을 요청해달라”고 했다.

A씨는 지난해 5월 소개팅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B씨와 연락이 닿았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금융사업을 하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한 B씨는 투자자들에게 직접 돈을 받아올 아르바이트를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유학생인 A씨는 이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실상은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의 현금수거책으로 포섭된 것이었다.

A씨는 그해 8월 누군지 알지 못하는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텔레그램 메신저 지시에 따라 경기도 의정부에서 피해자 한 명을 만났다. 이 피해자는 금융감독원 직원을 사칭한 조직원에게 이미 속아 넘어간 상태였다. 조직원은 피해자에게 전화해 “카드사 계약 위반으로 신용도가 하락해 대출이 되지 않고 있다. 예치금을 넣어야 신용도가 올라간다. 직원을 보낼테니 돈을 전해라. 예치금은 돌려주겠다”고 속였다.

A씨 역시 금감원 직원인 것처럼 행세하며 피해자에게 두 차례에 걸쳐 모두 3300만원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과정에서 금감원 명의 위조공문서도 제시했다.

조직원은 같은 달 또다른 피해자에게 서울중앙지검 최모 검사를 사칭하며 “온라인에서 당신 이름으로 사기 당한 이들이 당신을 고소해 조사를 해야 한다. 계좌에 있는 돈을 전부 인출해 건네달라. 불법자금 여부 확인 후 돌려주겠다”고 속였다. A씨는 조직원 지시에 따라 서울의 한 교회에서 피해자를 만나 현금 2400만원을 받았다. 이처럼 A씨는 지난해 7~8월 피해자 7명에게서 9차례 모두 1억1595만원을 받았다. 검찰은 A씨를 사기와 위조공문서 행사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A씨는 재판에서 아르바이트인 줄 알고 돈을 건네받아 전달만 했을 뿐 금감원 직원으로 행세한 적도, 범죄를 공모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 허정인 판사는 A씨에게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했다. 허 판사는 “A씨가 이 사건 범행의 구체적 내용과 방법 등을 잘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자기 이익을 위해 일을 하며 의심스러운 사정들을 외면하거나 용인했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A씨와 보이스피싱 조직 사이 공모관계를 인정했다.

허 판사는 “A씨는 소개팅 앱에서 B씨를 만났지만 한번도 대면한 적이 없고, B씨 사진을 받고 도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며 “A씨의 어린 나이와 사회 경험을 감안해도 아무 의심 없이 합법적인 일로 믿었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A씨가 피해자들에게 자신을 한국 이름으로 소개하고, 베트남 유학생이라는 사실을 밝힌 적 없는 점도 정상적이지 않다고 했다.

다만 허 판사는 “A씨가 범행 주도자가 아니고 얻은 이익이 크지 않는 점, 상당수 피해자와 합의한 점, 나이가 만 20세를 갓 넘을 정도로 어린 점, 수사·재판에 임한 태도를 고려해 법정 구속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A씨는 선고 직후 허 판사에게 “판결문을 베트남 말로 다시 들어볼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통역인은 A씨에게 거듭 “징역 1년 4개월”을 강조했다. 재판부는 “대리인을 통해 판결문을 받아볼 수 있다”고 고지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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