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7문 7답

베리타스고려대 포럼, 고 이어령 교수 미공개 인터뷰 공개
수평적 사랑 뜻하는 ‘필리아’ 제시…모든 생명 위한 청지기 삶 강조

고 이어령 교수의 미공개 인터뷰가 27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과학도서관에서 열린 ‘제5회 베리타스포럼’에서 공개됐다. 사진은 이 교수의 미공개 인터뷰 스틸컷. 베리타스포럼고려대 제공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1934~2022) 교수의 미공개 인터뷰가 세상에 공개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개월 만이다. 인터뷰는 고인의 별세 8개월 전에 촬영됐다. 영상에는 죽음을 앞둔 그가 한국교회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남긴 ‘사랑의 본질’과 ‘지성과 영성의 관계’ 등에 대한 메시지가 담겼다.

‘베리타스포럼 고려대’는 지난 27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과학도서관에서 ‘이어령, 청년에 답하다’를 주제로 ‘제5회 베리타스 포럼’을 개최했다. 베리타스포럼은 1992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시작된 ‘기독 지성 운동’이다. 다양한 기독 지성들을 초청해 강연과 토론을 진행하는 행사로 한국에서는 2018년 고려대에서 처음 시작했다. 주최 측은 이날 이 교수의 미공개 인터뷰를 상영하고, 김학철(연세대 기독교교양학) 교수와 배지완(고려대 서어서문학) 교수의 대담을 진행했다.

영상 속에서 ‘인생 선배’로 나선 이 교수는 청년 7명이 던진 7개의 질문에 직접 답했다. 7개 질문 리스트 가운데 “평생에 걸쳐 깨달은 사랑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변이 눈길을 끌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표현할 때 아가페적 사랑을 강조한다. 이와 함께 이 교수는 새롭게 발견한 사랑의 본질로 ‘필리아’를 내세웠다. 필리아는 그리스어 ‘필로스(philos)’에서 유래된 단어로 ‘우정’을 뜻한다. 그는 넓은 관점에서 필리아를 ‘바이오필리아(Biophilia)’ ‘토포필리아(Topophilia)’ ‘네오필리아(Neophilia)’로 구분했다.

이 교수는 바이오필리아를 ‘생명간 공생하고자 하는 의지와 사랑’으로 해석했다. 코로나19를 예로 들며 인간의 바이오필리아 상실을 꼬집었다. 이는 환경 보호·동물 보호를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들 끼리만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자연과 동물도 보호해야 하는 청지기로서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김학철(오른쪽) 교수와 배지완 교수가 27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과학도서관에서 열린 ‘제5회 베리타스포럼’에서 대담을 진행하고 있다.

토포필리아는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 ‘토포’와 필리아의 합성어다. 특별한 장소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이 교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토포필리아에 빗대어 설명했다. 네오필리아는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는 인간이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탐구하고자 하는 목표에 빗댔다. 이 영역에는 메타버스·인공지능(AI) 등이 포함된다.

이 교수는 미래에 인간이 탐구해야 할 영역으로 세 개의 필리아를 언급하면서 농업·의학·교육·인지 과학을 생명화 시대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필리아의 기본적 바탕은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조화를 이루고 수평적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있다.

김학철 교수는 “(교회가 세상과 공생하려면) 복음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우리가 예수의 복음을 삶속에서 살아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교회는 세상의 가치를 무작정 반대하거나 복음을 선전하는 곳이 아니다”면서 “먼저 사랑을 말하는 곳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럼에는 420여명이 참석했다. 영상 속 이 교수의 답변을 받아 적는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이해민(25)씨는 “강의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가짜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교회가) 진짜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베리타스포럼 참석자들이 27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과학도서관에서 열린 ‘제5회 베리타스포럼’에서 김학철 교수와 배지완 교수의 대담을 듣고 있다. 베리타스포럼고려대 제공

<다음은 고 이어령 교수의 7문7답 요약>

①어떻게 하면 대중적 쏠림 현상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디지털을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젊은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숫자에 의해 자신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닌가 고민한다. 최근 2030세대가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2030세대의 마음을 어떻게 공략할까 고민한다. 2030세대는 화성에서 온 사람이 아니다. 2030세대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과 느낌을 증폭시키고, 우리가 몰랐던 것을 젊은이의 감수성으로 바라본다. (그러한 이유로) 2030세대에서 우리를 발견하는 것이지 우리와 다른 2030세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젊은 사람들이 검색을 하는 이유는 혼자서 해결이 안되는 문제 때문에 남들이 어떻게 사나 궁금하기 때문이다. 경험으로 느끼는 것과 지성으로 아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는 계몽주의를 제대로 겪은 나라가 아니다. 이성과 지성이라는 터널을 지나지 않고 바로 개화기에 들어섰기 때문에 쏠림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쏠림 현상, 지성, 디지털을 떠나서 ‘나는 지혜를 사랑하는지, 육체를 사랑하는지’ 물어야 한다. 육체는 소비하는 것이지만 지혜는 창조하는 것이다.


②인생을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목표로 열심히 사느냐에 따라 열심의 의미가 달라진다.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인생이 그 방향으로 쏠린다.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다 보면 허탈함과 고통을 느낄 때도 있는데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남들과 똑같은 목표가 아닌 진정한 삶의 목표를 발견했다면 그 고통은 의미있는 고통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편안하게 죽으셨다. 절망의 끝은 희망이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고 지적인 것이다. 오늘 하루를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나님이 주신 가치있는 생명이다.

③지성적인 발전이 영적성장과 관련이 있나.
=지성과 영성을 대립 개념으로 보는 것부터가 원죄다. 우리는 이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죄를 겪지 않고, 지성이 저지르는 잘못을 겪지 않고서는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생전의 이어령 교수가 2007년 7월 일본의 한 호텔에서 고 하용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④본향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가장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무엇인가.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신의 뜻과 진리를 이해하고 신앙을 가질 수 있나.
=(예수님을 만나면) 부모님한테 어리광 부리듯이 엉엉 울지 않을까 싶다. 우리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셨냐, 얼마나 애태우셨냐고 호소하지 않을까. 내가 너무 큰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느끼는 순간 너무 죄송스러울 것 같다.

인간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완벽하다면 과학에만 의지하며 살지 굳이 왜 신앙을 갖겠나.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신을 알게 된다. 신앙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⑤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며 올바른 길을 위해 사는 것은 헛수고인가.
=보람있는 인생이다. 이룬 것이 없음에도 올바르게 살기 위해 고민하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귀하다. 뜻이 있으면 반드시 길이 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먹고사는 것에 만족하면 두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질문자가) 회의를 느끼는 이유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드려야 하는 것이다. 무리 속에서 ‘나 혼자만이라도 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부대를 이룬다. 하나님에겐 아흔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 양이 다르지 않다.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절대 헛수고가 아니다.


⑥평생에 걸쳐 깨달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울이 정의한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다. 사랑의 의미에 대해 이전에 쓴 것이 있는데 ‘필리아’가 있다. 그리스어로 ‘우정’을 뜻한다. 기독교에서는 아가페 사랑을 강조한다. 필리아는 아가페와 에로스 사이에 있는 수평적인 사랑이다.

바이오필리아는 생명간 공생하고자 하는 의지와 사랑이다. 인간이 자연이랑 동물은 보호하지 않고 인간만 잘 살겠다고 하는 것. 모든 생명은 같이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가 유지되는 것이다. 토포필리아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네오필리아는 인간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탐구하고자 하는 목표다. 우리는 미래에 바이오필리아, 토포필리아, 네오필리아를 연구해야 된다. 그리고 농업·의학·교육·인지 과학은 생명화 시대의 중요한 덕목이다.

⑦우리는 어떻게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나.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생각하라’를 항상 강조한다.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다는 건 (죽음보다) 더 강한 신념이 있다는 것이다. 딸(이민아 목사)이 시한부 6개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깨달았다. 딸은 죽음 너머를 본 것이다.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주관하신다.

유경진 기자 yk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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