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방폐장 예정 부지 정한 스위스, 지역 주민과 ‘컨테이너 사랑방’ 소통

스위스 북부 레게렌 근처에 있는 방폐장 방문객 센터 모습. 심희정 기자

불과 두 달 전 스위스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사용후 핵연료) 처리장 부지를 정했다. 방폐장 건설의 가장 큰 관문 중 하나를 통과한 셈이다. 남은 과정들도 만만치 않다. 실제 방폐장 건설까지는 30년 이상 걸릴 전망이다. 2024년 정부에 운영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고, 의회 승인을 거쳐 국민투표에까지 붙여야 한다. 기나긴 과정의 첫발을 성공적으로 뗀 배경에는 지역 주민들과의 활발한 소통이 있었다.

지난 2일 스위스의 방폐장 예정 부지인 북부 레게렌 지역을 찾았다. 취리히 시내에서 20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스위스 방폐물 관리 기업 나그라(NAGRA)는 이 지역이 방폐장 건설에 최적이라고 판단했다. 지질 조사 결과 사용후 핵연료를 처분하는 데 적합한 암석으로 확인됐고, 면적도 넓어 부지로 적합하다고 봤다. 나그라는 991m 지하의 암석까지 채취해 방폐장 부지로 적합한지 심층 조사했다.

지역 주민과 활발한 토론·교육으로 이뤄낸 동의
부지 선정 이후로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컨테이너 사랑방’을 만들었다. 방문객 센터(Visitor Center)로 불리는 이곳은 지역 주민들에게 방폐장을 설명하기 위해 임시로 마련됐다. 지역 주민들은 방폐장 건설과 관련해 궁금한 점을 묻거나 찬반 의견을 함께 토론한다. 주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방폐장이 어떤 시설인지, 사용후 핵연료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도 한다.
패트릭 스투더 나그라 미디어팀 팀장이 방폐장 부지와 관련한 지역주민들과의 소통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심희정 기자

패트릭 스투더(Patrick Studer) 나그라 미디어팀 팀장은 “기술에 관한 것뿐 아니라 주민들을 위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센터를 만들었다”며 “주민들을 회유하기보다는, 주민들이 정말 방폐장이 필요하다고 느끼도록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그는 이 과정을 ‘도전’으로 봤다. 패트릭 팀장은 “방폐장 부지를 정한 것은 과학적 측면의 도전이라면, 주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은 ‘사회적 도전’”이라며 “민주적 결정과 과학적 결정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설득의 힘으로 방폐장을 둘러싼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은 벌어지지 않았다. 방폐장 예정 부지 주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던 프랑스와는 정반대 모습이다. 패트릭 팀장은 “솔직히 지역 주민들의 긍정적 반응에 놀랐다”며 “집 근처에 방폐장이 생기는 데 대해서 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지역이 지질학적으로 방폐장 건설에 적합한 곳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반응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다만 방폐장 건설을 시작하면서 발생할 소음 문제는 아직 풀지 못한 과제다. 주변 지역에는 주민 1만5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탈원전 선언에도 속도 내는 방폐장 건설 계획
스위스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017년 탈원전을 선언했다. 이 역시 국민투표를 거쳤다. 가동 중인 원전 5기는 2034년까지 폐쇄하고, 신규 원전은 추가로 짓지 않기로 했다. 다만 최근 러시아발 에너지 위기로 원전을 재가동해야 한다는 요구도 분출하고 있다. 패트릭 팀장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임시 보관 중인 사용후 핵연료를 빨리 지하에 처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며 “일정을 무리하게 앞당기기보다는 인고의 시간을 갖고 제대로 방폐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용후 핵연료를 캡슐 형태로 보관하는 캡슐화 공장은 방폐장과 29㎞가량 떨어진 곳에 지어진다. 세계 최초로 방폐장을 건설한 핀란드가 캡슐화 공장을 방폐장과 같은 부지에 지은 것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패트릭 팀장은 “지금도 원전에서 사용후 핵연료를 옮기는 작업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이동 과정에서의 문제점이나 위험성은 없다”며 “캐니스터(건식 저장 용기)에 사용후 핵연료가 보관돼 있는 만큼 누출에 대한 우려는 없다”고 말했다.

스위스는 사용후 핵연료를 지하에 처분하면 1000년 동안 안전성이 보장돼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나그라는 사용후 핵연료를 담은 캐니스터가 10만년까지 안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패트릭 팀장은 “만약 사용후 핵연료가 아주 오랜 시간 뒤 캐니스터 부식 등으로 누출된다고 해도 그 용량은 아주 미미하다”며 “등산을 하면서 받는 방사선량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방폐장 건설이 예정된 스위스 북부 레게렌 지역의 부지 모습. 심희정 기자

방폐장은 임시 저장소의 10~15배 규모로 지어질 전망이다. 스위스의 임시저장소는 향후 50~60년까지 발생하는 사용후 핵연료를 보관할 수 있다. 국내 원전 중 고리·한빛 원전의 포화 시점이 2031년, 한울 원전이 2032년으로 10년도 채 남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여유가 있는 편이다. 스위스는 계획대로 일정이 진행되면 2050년에는 방폐장을 지을 것으로 기대한다. 패트릭 팀장은 “국민투표나 의회 승인 등에 문제가 생기면 60~70년까지 일정이 미뤄질 수도 있다”며 “임시저장소가 포화할 가능성도 고려해 사용후 핵연료를 추가로 보관할 방법 등을 추가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폐장 건설 논의를 시작하는 단계인 한국 상황에 대해서는 ‘속도보다 안전’에 초점을 맞출 것을 당부했다. 패트릭 팀장은 “어떻게 빨리 방폐장을 지을지가 아니라, 어떻게 더 안전하게 지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며 “한국과도 기술 연구를 협력하고 있는 만큼, 안전성에 초점을 맞춘 건설 계획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베팅엔(스위스)=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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